처음 형광등을 갈던 날, 그로부터 10년

mavis님의 '형광등 아래서' 라는 글을 보고 생각이 났다.
처음 내 손으로 형광등을 갈아 끼우던 날.

이불 보따리와 가방 하나와 약간의 책만을 들고 서울로 상경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석달쯤인가, 아직 혼자라는 외로움보다는 혼자라는 자유로움에 마냥 신났던 그 때, 새로운 사람들과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 시절이었다.
조금 늦은 술자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딸깍 스위치를 올렸는데도 방은 여전히 어둠속에 머물러 있었다. 딸깍딸깍 몇번을 움직여봐도 빈 소리만 텅빈 방에 울릴 뿐이었다.
형광등이 나가버렸군.

어두운 방안을 더듬더듬, 스탠드 스위치를 올리고 가방을 한구석에 던져놓고는 전파상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형광등의 가격이 생각보다 싸서 놀랐던가.
라이트세이버처럼 형광등을 휘두르며 방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생각해보니 나는 열아홉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형광등을 갈아본 적이 없더라.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그냥 끼우면 되는건가? 그냥 빼면 빠지나? 뭔가 다른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전기가 찌릿하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졌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세상아 덤벼라 살아왔으면서도 겨우 형광등 하나 갈아끼우는 것에 이렇게 고민하고 쩔쩔매다니.
순간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혼자살기'에서 감당해야 할 소소하고 뾰족한 걸림돌들이 눈앞에 펼쳐졌고 나에게 던져졌다.
정말 혼자구나, '아빠, 방에 형광등 나갔어요' 라고 얘기하면 다음 순간 환하게 불빛이 쏟아지던 그 세계는 이제 안녕이구나.
씁쓸한 맛이 혀끝에 돌아 입술을 핥았다.

주저주저하며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아빠 형광등 어떻게 갈아끼워?
아빠는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면서 설명해주셨고 옆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있던 엄마는 그러길래 집에서 사는게 좋은거야 딸래미야 배경음을 넣어주셨다.
듣고보니 어이없도록 쉬운 일이었다. 필요한 것은 스패너도 너트도 전기인두도 아니고 내 키를 보충해줄 의자뿐이더구만.

검게 변해버린 먼지낀 형광등을 빼내고 새로사온 하얀 형광등을 구멍에 맞춰 끼웠다. 그뿐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바퀴달린 의자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 그것 뿐.
조심조심 의자에서 내려와 스위치를 올리니 깜빡깜빡 잠시 머뭇거리다가 백색의 빛이 방을 가득 매운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렇게 간단한 것을 그리도 헤매다니 나는 바보 아닌가.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이겠지. 막상 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혼자하려니 두렵고 어렵고 망설여지는 이런 상황은 계속해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손을 빌려줄 사람은 없고 결국은 단 두개뿐인 내 손으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일들이 어디 한두가지랴.

약간의 서러움과 앞으로의 각오를 황망히 오가던 내 생각의 틈새로 전화벨 소리가 파고들었다.
"형광등 잘 갈아 끼웠어? 안어렵지?"
"응, 해보니 쉽더라."
"친구는 많이 생겼고? 학교는 재밌어?"
"선배들도 다 예뻐해주고 친구들도 많아. 수업도 재밌어."
"그래, 재밌게 지내고 술은 너무 많이 먹지 말고."
"네에, 걱정말고 주무세요."

부모님은 그날, 정말 걱정안하고 주무셨을까. 잠자리에 나란히 누우셔서 형광등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막내딸이 어찌 혼자 살아갈까 한걱정하신 것은 아닐까 지금도 궁금하다.
어쨌든 나는, 그날 만족스런 형광등 불빛 아래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댄스댄스댄스'를 읽다가 편안한 잠을 잤다.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도 완전히 혼자는 아니잖아. 그리고 역시 익숙해지면 혼자서도 뭐든 다 할 수 있을거야. 라고 꿈결에 중얼거렸던가 깜빡깜빡.

처음 형광등을 갈아끼웠던 그 날로부터 어느덧 십년 가까이 흘렀다. 가끔 우렁총각이 필요하다고 투덜대긴 해도 누구랑 같이 산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만큼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 길고도 눈 깜짝할 시간동안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법, 두꺼비집의 퓨즈를 갈아끼우는 법, 못질 하는 법, 낡아버린 양변기의 고무마개를 갈아끼우는 법, 수도꼭지를 갈아 끼우는 법, 블라인드를 다는 법, DIY 가구를 손쉽게 조립하는 법, 기타 자잘한 이것저것들의 노하우를 하나하나씩 배웠고 이제는 제법 능숙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혼자 살아가는 요령이 몸에 붙었다. 작은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다는 깨달음, 두 손으로 모자란 것은 혼자 끙끙대지 말고 서비스를 신청하면 된다는 명쾌한 사실 따위들.

그리고 역시 제일 중요한 요령은 절대 혼자라고 쓸쓸해하지 말 것.

by 니야 | 2005/04/26 11:50 | 낯선 꿈 | 트랙백(2) | 덧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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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宇宙의 털끝에 앉은 작.. at 2005/04/26 16:30

제목 : 빨래를 삶다.
대학교 1학년 때를 생각하자니 까마득하다. 대학 시절엔 거의 이문동의 외당숙 댁에서 살았는데, 열두 학기 중 한 학기는 그곳을 나와서 하숙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보내고 나니 그곳이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집에다 우겨서 하숙을 하기로 한 건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돈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였다. 82년 당시 대학가의 하숙비는 두명이 쓰는 방일 경우 12-13만원 선이었다. 방을 구하러 골목을 돌아 다니다가 전신주에 붙은 광고를 보게 되었다. 8만 5천원이라는 거다. ......more

Tracked from :: Trick or .. at 2006/01/25 19:48

제목 : 블로그 ON을 읽다
처음 형광등을 갈던 날, 그로부터 10년 ...more

Commented by 펠로메이지 at 2005/04/26 11:55
남자친구를 사귀면 저런 일은 단번에 해결! (단호)
덕분에 결혼한 저는 집안일을 전부 제가 하고 있습니다! (단호)


아니..이건 단호하게 말하면 안될 일인가...OTL
Commented by 제드 at 2005/04/26 12:27
전 남자라서 그런가, 자주 봐와서 그런건가.. 형광등 갈기, 못질 등등은 어렸을때부터 해본 것 같아요. 하지만 혼자 사니까 문제 되는건 그런 것보다 식재료 보관방법, 쓰레기처리방법, 빨래방법 등등 이더라구요..>_<
Commented by RocknCloud at 2005/04/26 12:49
^ㅡ^ 글을 읽으며 빙그레 웃음이 나네요.
이제는 가족이라는 무리를 벗어나 홀로 드넓은 초원이군요.
Commented by 이민우 at 2005/04/26 13:09
: 저는 가족과 함께 살지만 맡은 역할이 잡일꾼이기 때문에 다 할 줄 압니다.(...)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6 13:47
펠로메이지 / 예전 남자친구가 저런 걸 하나도 못하더라구요...(해결이 안될 수도;;)
제드 / 저는 오히려 빨래나 주방일이 쉽던걸요. 다 이것도 어릴적부터의 남녀 성역할에 길들여진 탓일까나요
RocknCloud / 초원..이라면 기왕 치타로 살고싶은데.
이민우 / 훈늉한 우렁총각의 자질이로군뇨!
Commented by 젯털 at 2005/04/26 14:19
ㅎㅎ... 외로움을 이기는 건 익숙해졌다 싶을 때...
그때가 다시 삐끗하는 때가 많더라구요...^^;
Commented by 뚜비두 at 2005/04/26 14:22
3년찬데, 두꺼비라든가 DIY가구라든가 블라인드라든가 다 하면 하(겠)지만 귀찮고 왠지 하기 싫어요. 전 아직도 그냥 훈늉한 우렁총각이 하나 생겼으면 하고 바라고 있네요. ㅎㅎ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5/04/26 14:24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법, 두꺼비집의 퓨즈를 갈아끼우는 법, 못질 하는 법, 낡아버린 양변기의 고무마개를 갈아끼우는 법, 수도꼭지를 갈아 끼우는 법, 블라인드를 다는 법, DIY 가구를 손쉽게 조립하는 법 중에서 할 수 있는 건 두가지 뿐이야. 아아 온실 속 난초 한포기.
Commented by mogoon at 2005/04/26 14:47
재밌네요..^^
Commented by 대추 at 2005/04/26 16:19
혼자만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정작 함께 할 사람이 생긴 후에도 자주 혼자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부디... 그 경지까지 이르는 일은 없으시길..
Commented at 2005/04/26 17:3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6 18:29
젯털 / 그렇게 삐끗할 때를 위해서 술이 필요한거죠..(탕!)
뚜비두 / 블라인드는 다시 달고싶지 않아요..아 벌받는 기분이었어요. 우렁총각은 정말 로망~
saraswati / 두가지라도 할 수 있는게 어디냐! 난초가 아름다워.
mogoon /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대추 / 동굴은 어두워서 싫어하니..아마 거기까진 안갈거에요^^
mmay / 그건 창피한게 아니에요! 캔뚜껑 못따는건 이쁜이가 아니라 내숭이 아닐까 싶은데요..(아닌가?)
Commented by 체셔 at 2005/04/26 19:06
앗 저도 딱 이런 감정이었는데.이젠 저도 자취 5년차라 이것저것 알아서 하고 오히려 혼자 있는 게 더욱 편해진 경지에 이르렀지만,아직까지 전세계약이니 등기등본이니 하는 이야기만 들으면 겁먹는 걸 보면 아직 프로페셔널 싱글은 아닌가봐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6 20:28
체셔 / 혼자 사는 사람들의 공감인가요. 이사도 이제 이골이 나서 계약이니 등기부등본 확인하고 확정일자 받고 다 챙기죠. 그래도 계약은 늘 조심스러워요
Commented by 좀비君 at 2005/04/26 20:47
저희 집은 어찌된게 별 문제가 안생겨서 할 일이 없군요. 예전 집에 살땐 곧잘 했던 일들인데 이젠 많이 어색해진 것 같습니다. 이젠 전자기기만 만지작만지작...하지만 저는 혼자살 때의 문제는 저 위의 그 무엇보다도 게으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혼자 살면 제법 끔찍할 듯도 싶네요.
Commented by 산왕 at 2005/04/26 21:24
음..형광등이 빠지지 않아 반년간 두개 중 하나만 켜고 살다가 지지난 주 반대 방향으로 돌렸더니 쉽게 빠져...

뭔가 회의에 빠져버렸습니다 ( ");
Commented by 갈림 at 2005/04/26 21:37
읽다가 잠시 가슴이 뭉클.....
니야님도 이 글 쓰다가 스스로 잠시 뭉클하셨을 거라는 데 10원!
Commented by 넋두리 at 2005/04/26 21:53
일단하면 뭐든지 됩니다. 다만 휴즈가 나갔을때 같은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죠...부모님이란 언제나 자식들이 불안한 법이죠. 태풍오면 거기 물안잠기냐고 전화하시곤 하죠.. 제가 있는데는 고지대인데 불구 하고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6 22:53
좀비군 / 저도 청소따위에는 꽤나 게으른편인데...냐옹이 털때문에 요즘엔 어쩔수없이 부지런해지더군요
산왕 / -_-a 회의에 빠질만 하군요...(퍽!)
갈림 / 10원은 언제드릴까요?
넋두리 / 역시 부모님들이란 다 같은 마음인가봐요
Commented by jamf at 2005/04/26 23:16
어두운게 싫어서 형광등 가는 것은 꽤 어렸을적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형광등, 전구를 사오면서 깨먹는 일은 자주 있군요-_-;
Commented by 장은짱 at 2005/04/26 23:31
" 제일 중요한 요령은 절대 혼자라고 쓸쓸해하지 말 것. " 에 맘이 짠해지네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7 09:11
jamf / 형광등을 버릴때가 늘 고민되어요. 어떻게 버려야하는지.
장은짱 / 훗훗훗. 요령이랄까요.
Commented by 쏘이 at 2005/04/28 01:33
처음 형광등을 갈아끼우고 내가 느낀 감정은..
뿌듯함이었는데..ㅋㅋㅋ
별거 아닌거야 당연지사고..흠..이제 뭐..어지간한 집안일은..ㅠ_ㅠ
Commented by 니야 at 2005/04/28 09:49
쏘이 / 강하게 크는거야!
Commented by nystory at 2006/01/25 19:47
바로 이 글을 읽고 '울컥'하여 찾아왔다는..
이 글을 읽으며 제가 처음 상경했던 때가 기억났고,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에 깊이 공감하여 눈물까지 글썽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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