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5월 04일
하트를 찾아서.
심장이 터져버렸어. 라고 내가 시선을 거두며 불안한 속내를 떨어뜨렸을 때, 언뜻 네 눈에서 슬픈 자주색을 본 것도 같았다.
- 만져봐도 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을 조심스레 뻗었다. 보기보다 부드러운 손이 내 가슴에 가만히 닿았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있었다.
그 어색한 시간을 끊은 것은 그였다.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그가 토해내듯 말했다.
- 콩닥콩닥 잘만 뛰고 있는걸. 조금 빨리 뛰고 있긴 하지만 아직 네 심장은 온전해.
과연 그럴까. 내 심장은 이미 산산조각나서 혈관을 타고 흘러다니고 있는 중인걸.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녹아서 사라져 버리고 있어. 아아, 너는 모른다. 이것은 심장이 아니다. 이렇게 쿵덕쿵덕 움직이는 것은 빈방에 울리는 시간의 초침소리일 뿐이라는 것을 너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내 시선을 그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 정말 심장이 사라져버린 것 같아?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흰 한숨을 내쉬면서 그가 지갑을 뒤적여 누렇고 구깃한 한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 찾아가봐.
심장재활전문의 PhD. Kim
진료시간 : 오후 4시 ~ 오후 10시 (일요일 및 공휴일 휴진)
전화번호도 팩스번호도 없었다. 다만 알아보기 힘든 약도가 뒷면에 그려져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나를 향해 때맞춰 손을 흔들었다. 명함을 쥔 손이 축축해져 왔다.
구겼다 편다. 구겼다 편다.
반복할 때마다 종이 위에 새로운 길이 거미줄처럼 생겼다.
침대에 몸을 뉘이고 눈부신 형광등을 구깃구깃한 명함으로 가렸다.
심장재활이라. 틱-택-틱-택.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늦은 봄을 향해 가고 있지만 밤공기는 아직 서늘했다. 팔에 돋은 소름을 감싸면서 명함의 뒷면에 그려진 약도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회색 막대들의 교차로에 빛바랜 붉은색의 하트가 있었더랬지. 유치하다. 게다가 오후 늦게만 진료하는 의사라니 이상하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널부러져 무기력한 숨을 쉬거나, 하트를 찾아나서는 일 뿐이니 어쩔 수 없다. 별로 기대는 안해.
분명 이 거리에서 세번째 골목에서 좌회전.
좁고 어두운 골목을 하나 둘 세고 세번째 골목의 입구에 섰다. 도무지 끝이 없어보이는 골목길이었다. 바닥은 부드러운 흙위에 성기게 돌을 놓아 아련한 느낌을 주었다. 돌과 돌 사이에 짧은 풀들이 자랐다.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이 좁고 긴 골목의 끝에 병원 따위가 있으랴 의심이 들었으나 지금은 우선 약도가 가리키는 대로 따를 수 밖에.
두근거림이 속에서 잠시 느껴졌으나 이내 가라앉았다. 발밑의 돌들은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에 닳아 매끈했고 나와 나란한 긴 담은 세월의 때가 묻어 반질했다. 그리그 그 반질한 담벼락 위를 온갖 낙서들이 가득 매웠다.
큐피드의 화살을 그려놓은 '누구와 누구 영원히' 따위의 흔하디 흔한 사랑의 맹세부터 '넘어져 코나 깨져라' 하는 귀여운 저주, '소변금지' 라는 고전적 낙서, 자끄 프레베르 싯구의 한구절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묻고 울어버렸지'
아마도 아침식사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었을 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실연이 아팠나보다.
나라 요시모토의 그림을 닮은 심술궂은 소녀의 그림도 있었고, 서툰 솜씨로 그린 금발머리의 공주님도 있었다. 왕자는 보이지 않고 성만 덩그러니 배경으로 그려져있다. 그래 아이야, 왕자님은 꿈꾸지 않는 것이 심장에 좋단다.
그렇게 낙서를 더듬으며 10분여를 걸었을까. 구부러진 골목의 뒷편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다. 지난 몇달간 아끼고 아껴 나눠들었던 노래.
신고있던 신발의 뒤축을 세번 부딪쳐 축복을 걸었다. 그리고 뛰었다.
숨이 차오르고 옆구리가 저릿해올 무렵 막다른 골목의 끝이 보였다.
노래는 이미 다른 것으로 바뀌어 오렌지 불빛과 함께 문 사이로 흘렀다.
'심장재활센터' 라고 쓰여진 작은 간판이 문위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옆에는 팔다리가 달린 붉은 하트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는데, 네온으로 만들어진 하트의 웃는 눈만 깜빡깜빡거려 마치 나를 놀리는 듯 했다.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심장재활 전문의라니 그런게 있을리 없다. 그것도 이런 후미진 골목 안에 우스꽝스런 네온사인을 달고 달콤한 인디팝을 틀어놓고. 심장과 함께 머리도 사라져버린거냐.
새어나오는 허탈한 웃음을 누르며 나는 심장재활센터라고 쓰여진 정체불명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나무문에서 나는 작은 삐걱거림과 함께 포근한 백열등의 빛이 쏟아져 골목으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등뒤로 문이 조용히 닫혔다.
하하하. 이곳은 술집이었다.
직접 뚝딱뚝딱 만든 듯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있고 내 정면의 바에는 체 게바라가 그려진 목이 약간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바텐더가 '어서오세요' 인사를 건냈다.
그였다.
- 왔구나. 안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가 술 한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붉은 카시스 소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 김박사님 물어볼 것이 있어요.
바의 높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며 내가 말했다.
- 뭔데?
- 생체의 심장은 이렇게 콩닥콩닥 잘도 뛰고 있는데 마음은 그 안에 있지않고 산산조각 공기중으로 흩어져 도망중이라면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마음을 잡으러 몸도 유랑을 해야하는걸까. 아니면 마음이 돌아올때까지 덜그럭거리는 빈깡통으로 살아야 하는걸까.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골목길의 낙서들이 떠올랐다.
영원한 사랑의 맹세와 '고개를 묻고 울어버렸지'
- 유랑도 빈마음도 필요없어. 새 마음을 키워 채우면 되는거지.
그의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맥주가 넘어간다. 버드 아이스.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 실은 여기 재활센터 아니야. 하트의 인큐베이터라구.
씨익 웃으며 그가 새빨간 혀를 내밀어 막 떨어지려 하는 내 눈물을 핥아주었다. 그리고는 곧 짜다고 투덜거리며 데킬라를 한잔 털어 넣었다.
나는 고개를 묻고 엉엉 울었다. 그의 길고 단단한 손이 몇번을 토닥였다가 멈추고 토닥이다 멈추었다.
그리고 몸의 수분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 즈음 몸을 일으켰다.
붉게 부어오른 눈을 훔치며 주머니를 뒤져 있는 돈을 모두 꺼내었다.
꾸깃한 천원짜리들과 꾸깃한 심장재활전문의의 명함이 함께 바 위에 놓였다.
- 인큐베이터 사용료야. 잘 부탁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섰다.
하트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깜빡였다.
# by | 2005/05/04 18:40 | 낯선 꿈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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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심장이 부셔져도 계속 해서 살 수 있는 것은 다시 새로운, 연약한 어린 심장이 생겨나는 걸테니, 소중히 키워나가는 것이 현명할지도.
jamf / 현명한게 무언지,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