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여행의 기록.

'그렇다면 아예 지금 가버리지 뭐'
'지금, 당장?'

그렇게 떠난 여행이었다.
내일 길이 많이 밀릴테니 되도록 아침 일찍 떠나자는 얘기를 마치자마자 그의 입에서 떨어진 대답은 그렇다면 지금 달려버리지 뭐.
하하하. 그래, 내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하는거지. 자정을 넘긴 시각에 대책없이 바다를 향해 달릴 수 있는 낭만을 가장한 무모함.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도 그 무모함이 좋았었다. 아무리 그래도 칫솔은 챙겨가야지. 바보야.
간단한 옷가지와 세면도구와 카메라를 챙겨 한밤중 집을 나선다. 이틀치의 양식을 가득가득 냐옹이 밥그릇에 채워주고 아이들을 꼬옥 한번씩 안아주었다. 잘 다녀올테니, 그동안은 니들이 이 방을 독차지하고 있어도 괜찮아.

여행을 위해 빌려놓은 차는 꽤나 좋은 차였다. 빠박씨, 신났다. 그는 드라이브를 즐기는 눈치다. 부드럽고도 힘있게 차가 달린다.
- 근데, 우리 어디로 가? 안면도 펜션은 내일 오후가 되어서야 체크인이라구.
- 글쎄, 뭐 길은 이어져있으니 맘 내키는 곳으로 가자.
- 나, 어릴 적에 아빠랑 자주 갔었던 만리포니 하는 곳 가보고 싶은데.
- 좋아, 피곤한 그대는 푹 자고 있으라구. 눈앞에 바다를 대령할테니.
서해안 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나는 곧 잠의 제국으로 입성하였다. 전날 과음으로 세시간밖에 못 잔 탓도 있지만 핸들을 움직이는 그의 손이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안심했던 탓이 더 크다. (근데,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잠들자마자 150km로 달렸다고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불빛에 눈을 반짝 떴을 때는 이미 서산 톨게이트에 들어서고 있었다. 레니 크레비츠의 노래가 흘러 나오고 시계는 2:39 의 파란 불빛. 와아, 금방왔네 정말.
드라이브를 좋아하지만 길치인 그를 위해 이제부터는 내가 표지판을 잘 보고 길안내를 해줘야한다. 새벽의 국도는 정말정말 한산했다. 만리포로 가는 길은 어둡고 좁고 게다가 밤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어서 꽤나 으시시했다. 허연 옷의 처녀귀신이 가로질러간다 하더라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 가로등 없이 캄캄한 길에 헤드라이트만 비춘다. 일부러 오디오의 볼륨을 올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댔다.
그렇게 40분쯤을 더 달려 새벽 3시를 넘긴 시각에 바다를 보았다. '만리포 사랑 노래비' 라는 우스운 돌이 반기는 바닷가. 비릿한 짠 냄새가 풍기는 성수기를 앞둔 한산한 새벽의 바닷가는 으슬으슬 추웠다.
불빛을 밝힌 단 한군데의 바닷가 횟집. 스물 두셋 남짓 되어보이는 한무리의 젊은이들이 시끌시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어부들로 보이는 주름가득한 손의 아저씨들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테이블에 우리가 앉았다.
회와 소주는 당연한 수순, 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도소리는 리듬을 타고 울린다. 그의 아버지와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고,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책없는 말썽쟁이 소년과 영악하기 그지 없었던 모범생 소녀는 서로 너무나 다른 길을 걸어 결국 여기서 손을 잡는다. 참으로 신기하여 날은 금새 밝았다. 어둠속에서 소리만 들려주던 바다는 서서히 그 하얀 거품을 드러낸다.

새벽의 추운 기운을 못이기고 네 다섯 시간 눈을 붙였다. 이미 해는 밝다 못해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비온다더니 날만 좋다. 이제는 안면도로 차머리를 돌려야 할 시간. 어제 밤의 그 으스스했던 길은 표정을 싸악 바꾸어 상큼하니 밝았다. 소나무가 드리워진 좁은 2차선의 도로에는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 긴 머리가 날린다. 고생하여 기른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여름이 되면 짧게 잘라버릴까 했었는데 조금 더 길러보기로 한다.
안면대교를 넘어 갯벌을 지나 안면도에 들어섰다. 시끌시끌한 읍내를 통과하여 휴양림이 가까워질수록 소나무 숲의 그늘은 점점 짙어져만 간다. 논에서는 물안개가 계속해서 피어오른다. 안개가 이렇게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처음 봤다.
와아아아아, 좋아 좋아. 공기도 너무 좋아. 근데 배도 너무 고파. 우에엥.
안면도 자연휴양림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게장과 함께 밥을 먹었다. 헤헷. 게장이라니 오랫만이다. 밥 한공기를 금새 뚝딱 비웠다. 비싸긴 비싸다만 그래도 뭐 잘 먹었으니 만족. 식당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나눠마시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로 다시 향한다.
휴양림을 지나 야쿠르트 목장을 지나 저수지를 끼고 비포장 도로를 터덜터덜 올라가니 언덕위에 예쁜 펜션들이 몇채 보인다. 우리가 하루를 보낼 펜션은 가장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2층에 자리잡은 방은 작았지만 멋졌다. 큰 창으로 바로 바다가 보이고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면 바닷바람이 불었다. 밤이 되면 바다모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할머니가 키를 건내준다. 하룻동안은 온전히 우리의 공간이다.
갯벌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섬이 보인다. 시야는 탁 트여 마음이 둥글해졌다.

짐을 간단히 정리하고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내려갔다. 거위 한가족이 꺽꺽대며 소란을 피운다. 성글게 다듬어진 수풀을 헤치고 내려가니 발밑에서 작은 게들이 사사삭 숨었다. 귀여운 것들. 바닷게들이 여기까지 올라와 집을 짓고 살고있나보다.
굴껍데기와 조개껍데기와 소라와 고둥껍데기들이 발밑에서 바스락바스락 부서진다. 부드럽고 진득한 갯벌은 가벼운 운동화 아래로 말캉하게 눌려 물을 내뱉었다. 길고 길게 이어진 갯벌을 마음껏 걷는다. 카메라에 담는다. 지금의 아릿한 기분을 그대로 보관하지는 못하겠지만 70%쯤 수분을 말려 간직할 수는 있으리라.
해안의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길에 이제 서서히 물이 차올랐다. 널찍했던 갯벌은 점점 모습을 숨겨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어느덧 갯벌위에 덩그러니 버려졌던 배들이 두둥 물위에 떠있었다.
타이밍 좋은 산책이었어.

모기들이 극성을 부리기 전에 작고 빨간 그릴에 숯을 가득 담아 테라스에 올렸다. 나무 테이블에 뜨거운 찌개를 올려놓고 상을 차리고는 그릴에 고기를 굽는다. 연기가 모락모락, 아삭한 야채도 빠질 순 없지.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바베큐 디너라니. 하루쯤 무릉도원이구랴.
술이 참 잘도 들어간다. 새벽에 나누던 이야기들이 다시금 이어졌다. 사춘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몇해전까지 도달한다. 방황하던 양아치 청년과 열혈 운동권 처녀는 아직도 한참을 돌아야 만나게된다. 그 시절에 서로를 만났다면 정말 기억에도 남겨두지 않았을테지. 웃는다. 얼굴은 붉어지는데 정신은 오히려 상큼하니 오늘 취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바닷가의 하루는 이렇게 빠른 듯 천천히 흘렀다.

커튼을 활짝 열어놓고 잠이 든 탓에 햇살이 자명종이 되어주었다. 안개가 잔뜩 낀 바다는 또 갯벌을 훤히 드러내어 놓는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침 드라이브를 나갔다. 차창을 활짝 열어놓고 해변도로를 달린다. 바닷바람에 젖은 안개낀 공기는 축축했고 차가웠다. 팔에 소름이 쫘악 돋았지만 창문을 닫지는 않았다. 이름이 귀여워 들어가본 작은 해수욕장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보름만 지나면 사람들로 북적이겠지.
방포항에는 낚시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꽤나 활기찼다. 아침식사 됩니다 라고 써붙인 식당에서 찌개와 굴밥으로 배를 채운다. TV에 옥림이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일요일 아침이긴 한가보다.
하루쯤 더 머물면서 바다낚시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낚시에 소질이 없어 늘 줄을 끊어먹지만 배를 타는 것은 너무 좋아하니까. 멀미따위 안하는 튼튼체질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체크아웃시간까지 바다를 보며 뒹굴거렸다. 잠깐 졸기도 하고 방울 토마토도 씻어먹고.
잘 쉬었습니다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 바닷가 언덕의 집과는 안녕.
일요일의 정체를 걱정하여 그대로 집을 향해 달렸다. 이름이라고는 정말 멋대가리 하나 없는 AB방조제, 짠내로 가득한 간월도를 가로지른다.
와아, 여기 좋구나 새삼 생각한다. 날이 쌀쌀해지면 다시와서 대하구이를 먹자고 약속한다.

걱정했던 서해안 고속도로는 제 속도로 쌩쌩 달려주었고, 말도많고 탈도많은 서해대교 행담도에서 얼음 가득한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약간의 정체구역은 박명수가 진행하는 개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낄낄거리는 것으로 무사 통과.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에는 피곤이 어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즐거웠어?'
'응, 무척이나'
'다음에 또 갈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이 여행의 기억이 바삭바삭해지면 그 때 또 촉촉한 여행을 가자.


(사진없는 텍스트 여행기는 처음. 사진은 따로 정리하여 갤러리에 저장하렵니다)

by 니야 | 2005/06/13 14:35 | 지구정복자료수집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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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렉스 at 2005/06/13 14:42
역시 여행기엔 니야님의 문장을 당할래야+_+;;
/ 우후..담엔 촉촉한 후기도 기대하죠+_+
Commented by 가부키쵸 at 2005/06/13 14:52
마지막 3줄의 염장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여행 가본지가 언젠지 기억이 까마득... 금굴산에 갔던게 마지막이긴한데...(그건 군에서 있었던 훈련이였잖아!!)
Commented by Nariel at 2005/06/13 14:53
아아... 바다에 가고 싶어졌어요. ㅠ_ㅠ
Commented by 퍼플 at 2005/06/13 15:39
어째서 이 여행기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남자친구'가 아니라 게장, 바베큐, 굴밥일까요? 솔로생활 5년에 사바세상을 초월...(했을리가 없잖아! -_-;)
Commented by 네모스카이시어 at 2005/06/13 16:00
이 글을 읽고 드는 첫 생각은, 나도 차 한대 있으면 좋을려나...라니. orz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5/06/13 16:01
ㅠ_ㅜ 부러비!
Commented by 초하류 at 2005/06/13 16:09
주말에 출근한 저로서는 ..대략 좌절.. ^^;;
Commented by RocknCloud at 2005/06/13 16:42
제대로된 염장포스트....

기리기리 기억되리라... ㅡㅡ;
Commented by RocknCloud at 2005/06/13 16:57
아참. 겨울의 안면도 여행.... 괜찮습니다.
쓸쓸하면서도, 왠지 따뜻한, 그런 곳이었습니다.
Commented by abangbear at 2005/06/13 16:57
무엇보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다는게 제일 부러워요 ㅠ_ㅠ 하루 외박도 엄마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터라.. 남자친구도 제대로 못보고 ㅠ_ㅠ
Commented by 레이 at 2005/06/13 17:11
그렇잖아요 요즘 주변에서 염장의 궁극을 맛보고 있는데 텍스트로 받는 염장이 훨씬 강하군요.T_T (그래도 부럽다 버엉-)
Commented by 니야 at 2005/06/13 17:38
렉스 / 아잉, 과찬이십니다. (얼굴 붉어진다)
가부키쵸 / 금굴산이 어디쯤인가요;;;
Nariel / 훗훗- 바다 좋아요!
퍼플 / 당연한겁니다. 애인님 보다는 밥! (퍽!)
네모스카이시어 / 렌트하세요- 요즘엔 할인도 많이 해주던걸요
saraswati / 아저씨를 얼른 졸라봐.
초하류 / 뭐, 저도 주말 출근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하하
RocknCloud / 노리고 썼습니;;(탕!) 겨울에 대하먹으로 다시 한번 가야겠어요
abangbear / 외박 허락용 친구를 만들어놓으세요;
레이 / 오, 그렇군요. 텍스트 만세!

Commented by MAGO at 2005/06/13 18:40
남자친구를 차있는 남자친구로 바궈야겠다는 생각이 1초간 들었습니다. 그 친구한테 들킬까조금 걱정이... (풉-)
Commented by jamf at 2005/06/13 19:20
차 있는 여자친구를 만들어야 겠습니다.
우선 차 없는 여자친구부터 있어야 하는데.
Commented by jungjuly at 2005/06/13 22:01
너무 좋으셨겠어요. 이 글만 읽어도 마음이 들썩들썩..
Commented by 똥사마 at 2005/06/13 22:11
좋겠습니담/
Commented by xizang at 2005/06/14 12:51
눈 앞에 바다를 대령하겠다니요;ㅁ;
너무 멋지잖아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5/06/14 13:37
MAGO / 렌트카도 있습니다. 운전면허만 있음 오케이.
jamf / 어쨌든 여자친구는 좋은겁니다. (응?)
jungjuly / 아직도 들썩!
똥사마 / 좋았어요
xizang / 울 애인님이 좀 멋져요(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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