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이 좋아

 어느새 날은 추워져, 어둡고 검은 길을 향해 햐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긴, 벌써 11월 중순이니 무리도 아니지.
 벌써 이사한지 3주가 되었으나 아직도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낯설다. 다만 지하철역부터 집 문앞까지의 거리가 날이 갈수록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새 동네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증거.
 또각또각 집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경쾌하다. 조용한 주택가라 좋다. 유흥가의 시끌벅적함에 귀가 문을 닫는 예전 동네와는 전혀 다르다. 평온하고 쌀쌀하고 따뜻한 방이 기다리고 있는 조용한 밤이다.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걷고있자니 코가 얼얼하다. 추위에 유난히 약한 나이지만 그래도 코끝이 찡해지는 그 느낌만은 좋아한다. 고추냉이가 잔뜩 들어있는 초밥을 좋아하는 것도 다 이 찌르르한 느낌 때문.
 하얀 입김을 후후 불어대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지는 순간, 저 앞 골목에 꼿꼿하게 세워진 날렵한 꼬리 두개가 보인다. 아, 이 동네에서 처음보는 길냥이들이다. 반갑다 얘들아.
 칠흑같이 새까만 옷을 입고 있는 날씬한 고양이 두 녀석.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고 호박색 눈을 또렷이 빛내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아주 씩씩해보인다. 길냥이답지 않게 검은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는 것이 쓰레기 봉투 옆에 서있어도 너무나 도도해보인다.
 나, 네가 무척이나 맘에 드는구나. 삼일에 한번씩 내 앞을 지나가주렴. 맛있는 밥을 전봇대 모퉁이에 놓아둘테니.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그 부드러운 피모와 똑바로 올려진 날씬한 꼬리, 어둠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호박색 눈. 피하지 말고 도도하게 살라고 나에게 얘기한다. 말없는 충고는 강력하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말에는 동물원에 가야겠다. 동물원.
 하늘 높이높이 고개를 쑤욱 빼고 있는 기린이 그 긴 목을 천천히 내려 나를 굽어살피기라도 하면 나는 인생의 은혜를 입는 기분이 든다. 심심해서인지 행위예술인지 앞뒤로 고개를 흔드는 동작만 반복하는 북극곰은 가엾지만 푹 퍼진 엉덩이가 위로가 된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막여우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물이지만 의외로 난폭하여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내 속과 같다. 뱀의 비늘은 차갑게 부드러워 위험한 향기가 감돌고, 내 손안의 과자를 향해 떼로 몰려드는 사슴은 순간의 공포를 체험케 한다. 코알라는..코알라는 부럽다. 저리 게으르고 냄새나도 귀엽다고 아우성이잖아.
 하아, 동물원의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찡그리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세상의 위험과 아름답지 못함과 또한 그러면서도 귀여운 일면들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라고 혼자 뭉게뭉게 멀리멀리 생각해버린다.

 집앞 수퍼에 들어가 동물모양 비스킷 '쭈쭈동물원'을 찾는다. 가게 아줌마와 얼른 친해져야할텐데 생각을 하며 달랑달랑 과자 상자를 들고 나온다. 사자를 꺼내 오독오독 씹는다. 자극적인 요즘 과자에 비해서는 조금 밋밋한 맛이지만 그래도 고소하다. 맛있네. 홍홍홍.
 역시 동물원은 좋아.

by 니야 | 2005/11/17 17:21 | 낯선 꿈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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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銀鳥-_- at 2005/11/17 17:35
예쁜고양이. 사는 곳 앞 횟집에 똘망똘망한 냥이 두마리가 있었는데 사라졌어요.
Commented by RocknCloud at 2005/11/17 18:26
제 블로그에 오시면 동물사진 몇장 있어요. 감광기 디렉토리에 가면 에버랜드에서 찍은거 몇장 있을겁니당~
니야님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글 읽으니까, 제 맘도 편해지는걸요. ^^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5/11/18 00:00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은 저만 보면 화들짝 놀라 도망갑니다. 고양이 먹어본 적도 없는데, 왜 그런걸까요;
동물원, 더 추워져도 열지 모르겠어요. 전에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가 '이 나이에 무슨 동물원이냐'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새삼 나는군요.
Commented by 산왕 at 2005/11/18 04:24
동물원 가본지 20년쯤 된 것 같습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더라...
Commented by 서영엄마 at 2005/11/18 11:11
코알라 2마리와 사는 나는.......... ㅡㅡ;; 하필 아로마를 골라도 유칼립투스, 애청채널 애니멀 플래닛. 코알라 맞다니깐 서영아빠. 최근엔 아기 코알라까지 생겨서 말이지. 그놈 방귀냄새가 얼마나 구린지~ 그래도 귀엽다고 난리.^^
Commented by 미스킴 at 2005/11/18 11:30
아~ 동물원가고프다.!!!!!!!!!
Commented by Nariel at 2005/11/18 12:14
니야님~~~ 나도 동물원 줘용ㅋ
Commented by vineglow at 2005/11/19 00:03
그 과자, 아직도 팔아요? ;
Commented by 시리우스 at 2005/11/19 01:35
동물원이라는 데를 가본지 정말 오래된것 같네요.... 동물들 잔뜩 나오는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아기동물들 안아보는게 소원이었습니다.....
Commented by kueilove at 2005/11/19 14:45
니야 좋아 너무 좋아 모든 것 주고 싶어~ 너에게 만은 내 맘을 속이고 싶지 않아... 동물원이였던가요?
Commented by _권_ at 2005/11/19 22:31
전 지금 하남집으로 이사오고 1년이 넘도록 적응 못했어요. 이사와서도 이사온 동네에서 잘 안놀아서 그런가봐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5/11/20 21:25
銀鳥-_- / 날도 추운데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RocknCloud / 벌써 봤답니다^^
달바람 / 커서 가는 동물원은 더 즐거운데 말이죠!
산왕 / 동물원 번개라도 칠까요;
서영엄마 / 아잉, 서영이 너무 귀여워요. 코알라 귀엽죠 역시.
미스킴 / 그렇죠! 만세!
Nariel / 담에 만날때는 주주 동물원을 들고!
vineglow / 울 동네 수퍼에서는 팔던걸요
시리우스 / 저는 사막여우 만져보는게 소원입니다.
kueilove / 그건 일기예보인가 뭔가 아닌가요;
_권_ / 하긴, 저는 늘 동네에서 노니까요;;; 하남이라니 한번도 가본 적 없군요
Commented by 라엘 at 2005/11/21 09:25
가끔 고냥님들은... 우아하고 도도하시죠. 우리 나비도 어찌나 새침하고 아름다우신지.
Commented by kueilove at 2005/11/21 10:13
널 사랑하겠어 언제까지나 우우우~ 이게 동물원인가;;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5/11/21 11:19
[파이이야기]를 읽은 뒤론 사자를 길들이고 싶어졌어
Commented by 니야 at 2005/11/21 11:47
라엘 / 아웅, 고냥님들 만세
kueilove / 아, 그게 동물원이군요
saraswati / 오오. 거기 사자가 나오는구나. 아직 못읽었으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5/11/21 15:04
아니 호랑이가 나와. 근데 나는 이왕이면 사자로.. 갈기가 이쁘거든.
Commented by 니야 at 2005/11/22 08:58
saraswati / 호랑이라면, 얼마전에 두만이와 압록이가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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