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 드 히미코 - 마주보는 인간들


근 한달만에 찾는 영화관이었다.
어둡고 아늑한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혼자와서 다행이다. 의자 깊숙히 몸을 묻고는 그리 생각한다.

메종 드 히미코. 작년, 외롭다는 기운이 목덜미를 스쳐가는 금요일밤마다 습관적으로 꺼내어 장면장면 돌려보았던 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의 이누도 잇신 감독 작품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이었다. 분명 마음을 꽉 채워줄거라고.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믿음을 넘치도록 충족시켜 주었고, 그 흘러넘친 촉촉한 여운이 아직도 발끝에 남아 침대를 적실까 차마 잠들지 못하고 있다.

흑백의 사진들과 촌스러운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게이 노인들의 양로원 '메종 드 히미코' 의 이야기다.
조금은 자극적인 소재 - 굳이 '조금' 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동성애가 자극적 코드가 될 시대도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 로 시작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조금도 자극적이지 않다. 다만 낯선 설정일 뿐.
커밍아웃하고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 히미코, 그를 증오하는 딸 사오리, 아버지를 만나 비로소 혼자가 아니었던 청년 하루히코, 그리고 가족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버리고 나온 가족 대신 메종 드 히미코에서 '유사 가족' 을 이루고 귀엽게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게이 할아버지들. 결코 동성애를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비하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들은 그들일 뿐이라며 똑바로 바라본다.
이 영화는 동성애에 관한,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

처음엔 마주보고 그 다음엔 상냥해지는 것. 영화 리플렛의 카피이다.
이 카피를 쓴 사람, 정말 이 영화를 깊이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마주보고 상냥해진다. 그곳에 사랑이 있다.
눈을 질끈감고 변태라고 짜증을 내던 사오리도 어느새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웃으며, 고민을 털어놓는다. 모멸당하는 게이 친구를 대신해 '사과하라' 고 바락바락 악을 쓴다.
아버지와의 첫만남에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던 그 순간에서, 나도 모르게 코피를 닦아주는 상냥함에 좋아한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다정하진 않아도 끝까지 무뚝뚝해도 이제 노려보던 눈은 상냥한 온기를 품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주보고 상냥해지는 것. 그것은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양성애자건 가리지않고 서로를 향한다. 그래서 가르지 말고 '사람' 이라 부르고 '사랑' 이라 부른다.
좋은 감정을 서로 느끼는 사오리와 하루히코가 결코 연인의 관계로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 것인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 히미코와 하루히코의 강한 유대감이 자연스런 사랑으로 느껴지듯, 사오리와 하루히코도 그렇게 불러야 맞는 것 아닐까.

이 영화가 이리도 마음을 울리는 것은 '딱 그만큼의 거리' 때문이다. '조제' 때도 그랬지만 이누도 잇신 감독의 연출의 핵은 '거리' 이다.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딱 그만큼의 거리. 더 가까이가면 신파고 순정만화가 되버리고, 더 멀리 가면 감정의 아지랭이가 보이지 않는다. 슬픈 이야기도 밝고 경쾌하게 그려낼 수 있는 힘, 그러면서 내 눈에 따뜻한 온기가 한방울 손가락을 타고 내릴 수 있게 하는 힘. 감독의 그 거리 안에서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사람은 애정의 아우라를 뒤에 입고 특별해진다. 나도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지는 영화의 힘이다.

귀여운 못난이를 연기한 시바사키 코우의 연기가 너무 좋았고, 천천히 가까워져 나를 끌어당기는 청년, 남자의 매력이 아니라 사람의 매력을 보여주는 오다기리 죠도 좋았다. 무엇보다 대사도 별로 없지만 그 엄청난 존재감 하나로 '메종 드 히미코' 의 모든 뒷이야기들을 끌어안는 히미코, 다나카 민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오래도록 기억될 영화, 아마도 DVD가 나오면 제일 먼저 집어들어 또 목덜미가 서늘한 날이면 이 장면, 저 장면 돌려가며 웃고 눈물지을 그런 영화다. 모르겠다. 요즘 내가 부쩍 외로움을 타서 그런 것일지도.
그래도 그래도, 스물 아홉해의 첫 영화가 이것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by 니야 | 2006/01/28 00:05 | culture | 트랙백(2)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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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unamoth 3rd at 2006/01/28 23:48

제목 : 메종 드 히미코
《윌 앤 그레이스》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별 생각없이 웃음을 흘리는 동안 정작 이야기의 당사자들은 편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미국은 그렇다 치고, 일본에서는 "물풍선을 던진다"면 하물며 국내에서는... 지금껏 쏟아낸 한낱 이야깃거리로 소구한 부주의한 웃음을 떠올려보라. 나도 짐짓 PC 한척 쓰고 있는것일까? "조금씩 마주보고, 서로에게 상냥해지면" 벽은 허물어 질것인가? 이어질 수 없는 시선과도 겹쳐져 메종 드 히미코에서《윌 앤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올해 시즌8을 끝으로 종영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윌......more

Tracked from 얼굴가리기 at 2006/02/05 02:48

제목 : 메종 드 히미코
무슨 이야기 부터 해야할까? 피곤하고 졸리운 새벽2시 입안이 말라 차가 한 잔 절실해진다. 찻물을 레인지위에 올려놓고 차를 우려낼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게다가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할 때 차로 잠을 쫓기는 싫다. 그저 빨리 쓰고 자야지 라는 마음으로 물한잔을 떠왔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배우 오다기리 죠 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청년, 허리와 엉덩이가 보기 좋은 남자, 오다리기 죠의 아름다움은 같은......more

Commented by 델핀 at 2006/01/28 00:27
안녕하세요~밸리타고 왔습니다.이 영화 어쩐지 끌렸는데,니야님 글 보고나니까 어쩐지 더 보고싶어지네요^-^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되바라진달의궁전 at 2006/01/28 02:42
"좋은 감정을 서로 느끼는 사오리와 하루히코가 결코 연인의 관계로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 것인가."

사람과 사랑의 이야기라고 정의내려지는 論들에 새삼 동감이 됩니다.
저도 이 영화가 스물일곱의 첫 영화여서 참 행복합니다.
전 25일날, 유료 시사회에 참석해, 포스터를 챙겨왔답니다.
한면에 <조제~>, 또 한면에 <메종 드 히미코>가 있었는데...

그나저나 오다기리 죠는 참으로 오묘한 아름다움을 가졌더랩니다.
Commented by 니야 at 2006/01/28 22:39
델핀 /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되바라진달의궁전 / 그죠, 오다기리 죠 정말정말 멋졌어요
Commented by 시리우스 at 2006/01/29 23:52
미화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다니, 오오 정말 보고싶어지네요.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6/01/31 09:02
나는 '사랑을 놓치다'를 보았지, 마지막 장면이 예술이셔! (주인공들 말고)
Commented by 니야 at 2006/01/31 09:15
시리우스 / 보시길 권합니다.
saraswati / 아아, 송윤아가 연기를 시작했다던 그 영화로군.
Commented by 미스킴 at 2006/01/31 19:59
보고싶네요. 보고나면 답답해진 가슴도 풀어지려나..ㅎㅎㅎ 그들이 일반인들을 바라보는 시선또한, 한줄 긋고 시작함이 없지는 않다는 사실에대해서..
Commented by 니야 at 2006/02/01 09:23
미스킴 / 네, 좀 위안이 되는 영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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