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느냔 말이야! 으앙으앙"

 완전 패닉 상태에서 다다다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괜히 애꿎은 메신저의 대화상대만 당황할 뿐이었다. 쟤가 왜저럴까 싶을 것이다. 그래도 성심성의껏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상대방이 고맙기만하다.
 실은, 패닉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스물 아홉이 되어서도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이 자신의 꼬락서니가 영 껄끄러울 뿐이었다. 청춘과 어른의 미묘한 차이점에 서있는 나이.

 어설프고 어리숙하게 '좋아합니다' 라고 대문짝만하게 광고하는 꼴이 되기도 싫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간만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생겼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 꽃잎만 떼며 좋아한다 아니다 청승떨기에는 성격이 너무 되바라졌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전혀 모르겠으니 이번 기회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눌어붙은 누룽지가 되든 한번 질러볼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나를 초콜릿의 세계로 인도한 것일게다. 그런데 또 스스로 '무슨무슨 데이'따위 귀찮고 싫어라 하는 주제에 발렌타인이라고 빌붙는게 유치해 보일까 두렵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딜레마. 아아 모르겠도다. 나는 모르겠도다. 귀찮아 귀찮아. 세상에 고민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로 머리를 쥐어뜯다니.
 역시나 평소에 늘 해오던 방법대로 처신하기로 마음 먹는다. 일명 '일단 질러놓고 욕망에 충실한다'
 우선 초콜릿을 사고 본다. Lam Santos 두통을 주문한다. 도착하면 한통을 개봉하여 스스로의 간헐적 우울증 치료제로 쓴다. 이 맛나는 훌륭한 약제를 보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보내지 않는다. 아까운데 내가 먹지 뭐. 초콜릿 한통이 아까울 정도의 마음이라면 고민거리도 안되니까. 독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넘어서서 보내고 싶어진다면 보낸다. 나중에 바보되든 아니든 상관없다. 소포로 곱게 싸서 보내는 것이 너무 순정만화적이라면 술을 사내라며 호통치고 불러내서 전해줘도 된다.
 흠, 어쨌든 고민은 주문한 초콜릿이 도착하는 이틀 뒤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아하하하 단순한지고.

 그러고보니 내 손으로 발렌타인 즈음 초콜릿을 준비하여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난다. 손을 꼽아 세어본다. 작년 2월, 재작년 2월 다 애인따위 없었고 그 전인 2003년 2월달에는 애인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으니 분명 뭔가를 주었겠지. 근데 아마도 그것이 초콜릿은 아니었지 싶다. 음반이나 책같은 것이었을거야. 진짜 주고 싶은 맛있는 초콜릿은 그때 내 주머니 사정상 너무 비쌌으니까. 언제가는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어울리지 않는 짓도 했더랬는데 그게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몇명의 사람들을 떠올려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고 유리창 저편에서 하나하나 살펴보지만 도무지 범인은 못찾겠다. 어느 날 갑자기 '범인은 절름발이다!' 뒷통수를 치며 생각나기를 기다릴 뿐.
 누군인지는 가물가물하여도 어쨌든 그때는 가슴이 부풀었겠지, 두근두근 했겠지, 받고 좋아해줄까 고대했겠지, 아무리 초콜릿 회사의 상술이라 고개를 내저어도 베어물면 눈이 스르르 감기는 초콜릿의 유혹에 기꺼이 동참하며 즐거웠겠지. 기억나지 않는 초콜릿의 단내는 희미하다.

 연애란, 사랑이란 초콜릿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맛있고 매혹적이고 순간의 우울을 날려버리는 힘을 가졌지만 녹아 사라진 뒤는 씁쓸 텁텁하고 다 먹어버린 초콜릿 상자는 그 잔향으로 괴롭힌다. 해결 방법은 빈 상자는 재활용품으로 내어놓고, 텁텁한 입은 물로 헹구어 잊는 것이다. 섭섭하지만 개운하게.

 따뜻한 것이 그립고, 사람의 품과 내 머리를 부벼주는 손길이 그립고, 달콤하고 진한 키스가 그립고 꼭 잡은 손에 배어나는 축축함의 기운이 그립다.
 칫, 초콜릿 얼른 와라.

by 니야 | 2006/02/10 16:20 | 낯선 꿈 | 트랙백(2)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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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at 2006/02/1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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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araswati at 2006/02/10 16:31
이봐요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겁니까! 실은 나도 쵸콜렛으로 고백해본 적 따위 한번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십대초반에 해볼껄 그랬지 뭐야.
Commented by 렉스 at 2006/02/10 16:50
이 초콜릿은 우정 초콜릿이다!라고 소리 냅다 지르고 다다다 도망가는 일본만화(또는 드라마)의 풍경을(어이)
Commented by ☆*깨*☆ at 2006/02/10 17:15
와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니 축하드려요!!
전 이제 누나랑도 함께 안사니 받을 수가 없지만요.ㅠ.ㅠ
예쁘게 잘 전달하세요.ㅋ
Commented at 2006/02/10 17: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arlowe at 2006/02/10 18:25
OTL OTL OTL 발렌타인 데이와 크리스마스는 솔로들의 초상날 OTL OTL OTL
Commented by 시리우스 at 2006/02/10 19:24
주고싶은 사람이 생겼다니 축복받을만한 일인데요? 초콜릿을 전해주시든 안전해주시든, 전해주시고 나서 결과가 어떠하든 니야님 결정에 후회없으시길. 이왕이면 전해주시는 동시에 좋은 결과까지 얻으셨음 좋겠네요~
Commented by 달바람 at 2006/02/10 22:31
아, 정말 이러다 다음에 봤을 때 귀엽다며 볼 잡아 당겨도 전 책임 못집니다.
Commented by _권_ at 2006/02/11 01:02
초콜릿이 도착하면 한 번 더 고민하는 포스팅이 올라올 거라 섯부르게 예측을 해봅니다... 씨익

이런 무슨무슨데이만 되면 이런 소리를 했지요. 띄워줄 때 즐겨라. 띄워줄 때 즐기지 언제 즐기냐. 라고... 이런 날 그냥 넘어가도 상관 없지만 그냥 넘어가면 또 섭섭한게 사람 마음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하간 전 매년 그냥 넘어갔는 데 올해는 살짝 기대를 해봅니다.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혼자 두근두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요... 뭐... 안 줘도 어쩔 수 없지요. 오래간에 걸쳐 이제야 겨우겨우 힘들게 시작했으니까요. 조금 서운해도 그냥 잊고 제가 더 잘해주면 되지요.
Commented at 2006/02/11 01:1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AGO at 2006/02/11 02:39
올해는 본격적으로 만들어 볼겁니다 ;ㅁ;
Commented by 미스킴 at 2006/02/11 10:43
마음의 무게는 싣는만큼 무거워지는 것 같은데, 기대없이, 그냥 주는 거. 그 이후는 그때가서.. "넌, 아닌거 같애.."한다면, "그래서, 어쩌라고..." 알 수 없는 웃음만 보여주고 냅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 이후로는 무반응 _-_ ...어느 순간 낚여있는 "그"를 발견한 적 있었습니다. 푸하하하하..ㅡㅡ믿거나 말거나
Commented at 2006/02/11 11: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니야 at 2006/02/11 21:57
saraswati / 정석대로 하자면 십대때 해봤어야;
렉스 / 우정 운운하기에는 이미 너무 나이 먹어버렸어요 엉엉
깨 / 아닛. 이런 미소년에게 초콜릿 주는 처녀가 없다니 말이 아니되오!
비공개 / 우리 모두 초콜릿을 질러보아요
marlowe / 누가 압니까, 두근두근 초콜릿이 집으로 배달될지
시리우스 / 토정비결만 믿고 있습니다. (퍽!)
달바람 / 제 볼은 탱탱해서 잘 안땡겨집니다. 아하하
권 / 좋은 일 있는 기쁜 발렌타인되길!
비공개 / 아하하, 알겠사와요
MAGO / 오오 핸드메이드!
미스킴 / 그래서 어쩌라고! 멋지십니다
비공개 / 네, 알려드렸죠?
Commented by saraswati at 2006/02/13 09:05
난 십대때 진정 씨니컬했거든. 그나저나 왔나 쵸꼬렛.
Commented by 니야 at 2006/02/13 09:22
saraswati / 응 왔다 쪼꼬렛. 느무 맛나드라. 보내기로 했다
Commented by 안드로이드 at 2006/02/14 20:47
역시나 니야님의 글은 맛있어요. 아삭아삭한 씹힘이 좋았던 글이 기억에 나네요. 달콤한듯 늘어지는 고소함이 느껴지는 이 글도 좋아요.
Commented by 라엘 at 2006/02/14 23:57
헤헤 >ㅈ< 귀여우신 니야님~
Commented by 니야 at 2006/02/15 10:02
안드로이드 / 아잉~
라엘 / 역시 아잉~
Commented by kueilove at 2007/02/14 16:32
오늘 문득 이게 먹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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