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쓴 글은 지워버리고 싶어지는 법이다

늦었다고 할 수 없는, 그나마 PT기간 치고는 이른 퇴근길이었다. 수화기 너머를 통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응원하던 예쁜 연인들이었는데, 어이없이 헤어졌다고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뭐라 해줘야 할지 할말을 못찾고 그저 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횡설수설을 풀어놓았다. 결국 전화로는 부족해 PT가 끝나고 만날 약속을 잡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이런 이야기에는 시선의 교환과 토닥거리는 손짓과 술과 음악이 필요한 법이다.
사랑에는 끝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게 왜 하필 지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지금'이 닥쳐오면 당황하고 어쩔줄 몰라하고 슬퍼할 수 밖에 없는 여린 청춘.

약간 우울해진 기분을 안고 버스 창에 기대어 창밖의 풍경에 의식을 놓고 있는데 애견샵의 유리 너머로 아주 귀엽고 작은 강아지가 보인다. 두 발을 나무 난간에 올리고 사람을 기다리는 작은 강아지.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무언가를 바라는 촉촉한 눈이겠지. 나는 순간, 몹시도 우리 고양이들이 보고싶어졌다. 집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녀석들.
그러나 금요일 밤의 도로는 10시가 넘은 이 시각에도 꽉 막혀 빨간 브레이크등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붉은 빛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속에 뭔가 꽉 차오른 것처럼 답답하다. 지금 당장 우리 고양이들을 안아 올려 그 풍성한 털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하고 싶은데, 도로는 끈적하게 엉겨있다. 목구멍까지 답답함이 치밀어 토할 것 같다.

오랜 시간을 지리하게 버스에 갇혀있다 드디어 우리 동네에 도착한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몸을 감싸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냐옹' 하고 나를 반기는 목소리에 가방을 내던지고 고양이들을 안아올려 코에 뽀뽀한다. 그 풍성한 털에 볼을 문지른다. '아우 보고싶었어 보고싶었어' 주문처럼 되뇌인다.

털이 잔뜩 묻어버린 옷을 벗어던지고 시원하게 내리는 샤워기의 물줄기 아래에서 맥주 생각을 했다. 냉장고에 기네스가 한캔 남아있었더랬지. 대충 물기를 닦고 쇼파에 몸을 던져 한달여를 냉장고에서 묵어 차가워질대로 차가워진 기네스를 한달음에 들이킨다.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내 무릎 사이에 자리잡은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울고 싶은데 울 이유가 없구나.

고양이의 심장은 두쿵두쿵 뛴다.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진짜 연애 있잖아.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두쿵두쿵 심장소리가 들려서 마음이 전염되는 진짜 연애. 어제의 외로움 혹은 외롭다고 믿어버리는 셀프 어리광은 밤새 또 그렇게 위기를 넘긴다. 아무래도 생리할 때가 되었나보다.
 

by 니야 | 2006/08/26 23:15 | 낯선 꿈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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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행인1 at 2006/08/26 23:17
밤 동안에 쌓였다가 해소되는 감정인가요?
Commented at 2006/08/26 23: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푸른별리 at 2006/08/26 23:40
긴 말 없이 공감. (쓰윽 니야님 손을 잡아버린다)
Commented by vineglow at 2006/08/26 23:45
고양이는 주인이 부를 때 오지 않고 자기가 배가 고프면 와서 부비작대지요. 발톱으로 빡빡, 주인이 아프던지 말던지 혹은 자기 손톱이 꺾이던지 말던지 말이지요. 재밌지 않나요? (웃음)
Commented at 2006/08/26 23: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8/26 23: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별당 at 2006/08/27 01:10
마음 깊숙한데를 파고드는 글이네요..^^
Commented by 작은인장 at 2006/08/27 16:16
니야님의 글들은 항상 뭔가 있는 것 같아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6/08/27 22:53
행인1 / 어쩌면요. 생리가 끝나면 해소될지도 모르죠
비공개1 / 아우 고마워요. 언젠가는 볼 날이 오겠죠
푸른별리 / 흑흑- 따스하여라
vineglow / 그래서 좋아요. 고양이들이란.
비공개2 / 네, 올리면 밤에만 보던가.
비공개3 / 무거워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어요
별당 / 밤에 쓴 글이죠. 후후
작은인장 / 별거 없는 넋두리에요
Commented by 시리우스 at 2006/08/27 23:09
뭔가... 굉장히 감성적이 되는 글이군요 ㅠ 저도 부비부비 할 애완동물이 있었으면 싶네요. (그럴 여건도 안되면서 -_-)
Commented by Damon at 2006/08/27 23:24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 일산으로 이사갈 것을 생각중입니다. 이것도 변덕에 그칠지 모르지만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6/08/27 23:36
시리우스 / 역시 부비부비는 좋죠. 홍홍
Damon / 상수동에서도 키울 수 있어요!
Commented by Damon at 2006/08/28 03:19
그나저나 도대체 휴가는 며칠 예정이시랍니까.
Commented by 니야 at 2006/08/28 09:29
Damon / 추석연휴 전주에 휴가를 내서 추석까지 죽 뭉개는 일정입니다. 9월 23일날 비행기 타고 떠나서 10월 6일날 돌아올거에요
Commented by Lohengrin at 2006/08/28 10:20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찾아와서 불쑥 사라진달까..

언젠가는 또 인연을 만나겠지. 라는 생각으로 삽니다.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랄까욤
Commented by sesism at 2006/08/28 10:52
'가슴에 귀를 대고 있으면 두쿵두쿵 심장소리가 들려서 마음이 전염되는 진짜 연애'
정말 공감되고 감동되어요. 나는 두 손으로 별리님과 니야님 손을 잡아본다. (으응?)
Commented by 니야 at 2006/08/28 10:56
Lohengrin / 그러게 인연.
sesism / 손에 손잡고 둥글게 둥그레!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6/08/28 15:27
밤에 쓴 편지는 항상, 보내고 나서 후회를 하게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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