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9월 01일
사랑해야 하는 딸들
블로그가 인연이 되어 '자연을 담는 큰 그릇' 이라는 풀무원에서 나오는 사외보에 글을 싣고 있다. 계절마다 한권씩 나오는 것이라 부담도 없고, 소재도 내 맘대로라 - 그냥 문화 이것저것 잡담들 -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보낸다. (게다가 다른 곳보다 고료도 쎄고;;;)
얼마전에 가을호 원고를 보냈다. 두 계절이나 지났으니 봄호에 실렸던 글을 올린다. 예전에 포스팅했던 엄마에 관한 글과 '사랑해야 하는 딸들' 에 관한 글을 새로 덧붙여 만화 소개글로 재구성했더랬다.
(참고로 여름호는 천안까지 미술관 순례..라는 글이었고, 가을호는 '오만과 편견' 3종셋트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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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다 커버린 딸들에게.
-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 (시공사)
늦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와 노곤하게 굳은 몸을 말랑하게 씻고서야 하루의 피곤이 발끝을 간지럽히는 파도처럼 밀려든다. 침대에 잠시 몸을 뉘이는 순간, 스르륵 의식은 현실을 거부한다.
오랜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다. 꿈속의 엄마는 삼십대 후반. 흰머리도 거의 없고, 딸에게 책을 읽어주며 책장을 넘기는 손은 아직 곱다. 나는 네 살, 이제 막 한글을 떠듬떠듬 읽기 시작하였다. 볼은 터질 듯 통통하고 머리에는 플라스틱 핀을 가지런히 꽂았다. 엄마와 딸은 나란히 방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내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이다. 가장 먼 기억은 늘 엄마의 책 읽는 소리와 고양이로 시작한다. 유아용 그림책이 몇 권 있었지만 내가 늘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것은 여성지 뒷부분에 실린 짧은 이야기였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고양이와 털실 그림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지겨워하지도 않고 몇번씩이나 읽어달라 졸랐었지. 엄마의 목소리는 꽤나 높은 하이톤이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았던 시절의 얘기다.
그 꼬마는 어느 새 훌쩍 커버려 어른하고도 서른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던 시절을 거쳐, 엄마의 잔소리에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싸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도 지나 이제는 엄마가 친구같이 느껴지는 그런 다 커버린 딸.
여기 그런 딸들을 위한 만화책이 한 권 있다.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
엄마가 해주는 밥이 생각날 때, 그 허기를 달래기 위해 대부분은 냉장고를 뒤져 대충 한공기 뚝딱 해치우고 말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이 만화책을 꺼내어 읽는다. 어쩌면 이렇게 ‘엄마와 딸’ ‘딸과 딸’ ‘딸들’ 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놓는지 바로 내 옆에서 엄마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이야기는 독립하는 딸의 이야기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이 살아왔던 딱 나의 나이에 와있는 딸 유키코는 갑작스레 엄마의 재혼 선언을 듣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게다가 명목상 ‘아버지’ 가 되는 재혼상대는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린 호스트바 출신 사극배우 지망생이니 이거 이만저만 충격이 아니다.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가출하고도 남을 일. 그러니 생활이 평탄할 리 만무하다. 티격태격하며 엄마와 어린 청년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던 딸 유키코는 ‘어떤 괴리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살겠다 선언한다. 젊은 계부가 못마땅하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튀김을 싫어하는데도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돈까스를 요리하고, 자기가 늘 부러워했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젊은 청년과 함께 목욕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힘들었던 것. 언제나 나만의 엄마였던 존재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
엄마는 단지 엄마일 뿐인 어린 시절은 저만치 사라지고, 엄마도 사람이고 섹스도 하며, 에로스적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임을 인지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딸. 나만의 엄마를 빼앗기는 것이 슬프지만, 엄마는 딸의 소유물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책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낸다. 딸이 자라서 엄마라는 ‘동성 친구’를 발견하는 그때야말로 비로소 딸들이 독립하는 순간이 아닐까. 어쩐지 슬프고 애잔하고 그렇지만 뿌듯한 딸의 독립이자 엄마의 재발견이다.
짐을 챙기며 우는 유키코의 등 뒤로 엄마의 손길이 닿는다. 아무 대사 없는 그 그림 한 장면이 이 만화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엄마와 딸’ 의 관계를 이렇게 멋지고 섬세하게 풀어내는 만화를, 아니 이야기를 나는 여태껏 보지 못했다.
선명하게 머리를 울리는 첫 에피소드 이후로도 요시나가 후미는 짧지만 농밀한 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어딘가 결여되어 나쁜 남자에게만 매달리는 수줍은 여대생의 한숨 나오는 이야기도 있고, 사랑을 듬뿍 받아 마땅한 멋진 여자이지만 정작 누군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인 내 친구의 이야기도 있다. 멋진 독립 여성이 되겠다 꿈꾸었지만 이제는 그 꿈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친구의 뒷모습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또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쓴 침을 꿀떡 삼키고 웃으며, 어디선가 꿈을 향해 우직하게 살고 있는 다른 친구의 이야기에 기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 친구들의 이야기도 당연히 그려낸다. 왜냐면 이건 여자들의 이야기거든. 그렇다면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엄마의 엄마 이야기다. 소위 예쁘고 싸가지 없는 공주병 친구에게 받은 못생긴 얼굴에 대한 할머니의 상처는 ‘예쁘다’ 소리 한번 못들어 본 엄마의 오래된 트라우마로 이어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고나 할까.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절대 울지 않을거라 얘기하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 장례식에서 펑펑 울거야’ 라고 말해주는 딸은 그 오래된 트라우마를 감싸고 보듬는 존재이다. 아아,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딸이자 여자들의 이야기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다시 읽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 엄마. 살은 좀 빠졌냐 라고 ‘얘가 저러다 노처녀로 혼자 사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걱정을 섞어가며 되물으시는 엄마는 여전하다.
비밀이 생기고 독립적인 생활이 생기고 엄마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다. 그리고 새로이 베스트 프렌드를 얻었다. 이것이 엄마와 딸의 불가사의한 관계.
만화는 너무 가볍다고, 현실성 없는 신데렐라 얘기만 늘어놓을 뿐이라고 여기는 우리 큰 딸들에게 이 만화와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을 권한다.
얼마전에 가을호 원고를 보냈다. 두 계절이나 지났으니 봄호에 실렸던 글을 올린다. 예전에 포스팅했던 엄마에 관한 글과 '사랑해야 하는 딸들' 에 관한 글을 새로 덧붙여 만화 소개글로 재구성했더랬다.
(참고로 여름호는 천안까지 미술관 순례..라는 글이었고, 가을호는 '오만과 편견' 3종셋트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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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다 커버린 딸들에게.
-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 (시공사)

오랜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다. 꿈속의 엄마는 삼십대 후반. 흰머리도 거의 없고, 딸에게 책을 읽어주며 책장을 넘기는 손은 아직 곱다. 나는 네 살, 이제 막 한글을 떠듬떠듬 읽기 시작하였다. 볼은 터질 듯 통통하고 머리에는 플라스틱 핀을 가지런히 꽂았다. 엄마와 딸은 나란히 방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내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이다. 가장 먼 기억은 늘 엄마의 책 읽는 소리와 고양이로 시작한다. 유아용 그림책이 몇 권 있었지만 내가 늘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했던 것은 여성지 뒷부분에 실린 짧은 이야기였다.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고양이와 털실 그림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지겨워하지도 않고 몇번씩이나 읽어달라 졸랐었지. 엄마의 목소리는 꽤나 높은 하이톤이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았던 시절의 얘기다.
그 꼬마는 어느 새 훌쩍 커버려 어른하고도 서른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던 시절을 거쳐, 엄마의 잔소리에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는 싸가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도 지나 이제는 엄마가 친구같이 느껴지는 그런 다 커버린 딸.
여기 그런 딸들을 위한 만화책이 한 권 있다.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
엄마가 해주는 밥이 생각날 때, 그 허기를 달래기 위해 대부분은 냉장고를 뒤져 대충 한공기 뚝딱 해치우고 말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이 만화책을 꺼내어 읽는다. 어쩌면 이렇게 ‘엄마와 딸’ ‘딸과 딸’ ‘딸들’ 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놓는지 바로 내 옆에서 엄마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이야기는 독립하는 딸의 이야기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이 살아왔던 딱 나의 나이에 와있는 딸 유키코는 갑작스레 엄마의 재혼 선언을 듣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게다가 명목상 ‘아버지’ 가 되는 재혼상대는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린 호스트바 출신 사극배우 지망생이니 이거 이만저만 충격이 아니다.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가출하고도 남을 일. 그러니 생활이 평탄할 리 만무하다. 티격태격하며 엄마와 어린 청년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던 딸 유키코는 ‘어떤 괴리감’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살겠다 선언한다. 젊은 계부가 못마땅하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튀김을 싫어하는데도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돈까스를 요리하고, 자기가 늘 부러워했던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젊은 청년과 함께 목욕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힘들었던 것. 언제나 나만의 엄마였던 존재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는 것을 계속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
엄마는 단지 엄마일 뿐인 어린 시절은 저만치 사라지고, 엄마도 사람이고 섹스도 하며, 에로스적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임을 인지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딸. 나만의 엄마를 빼앗기는 것이 슬프지만, 엄마는 딸의 소유물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책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낸다. 딸이 자라서 엄마라는 ‘동성 친구’를 발견하는 그때야말로 비로소 딸들이 독립하는 순간이 아닐까. 어쩐지 슬프고 애잔하고 그렇지만 뿌듯한 딸의 독립이자 엄마의 재발견이다.
짐을 챙기며 우는 유키코의 등 뒤로 엄마의 손길이 닿는다. 아무 대사 없는 그 그림 한 장면이 이 만화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엄마와 딸’ 의 관계를 이렇게 멋지고 섬세하게 풀어내는 만화를, 아니 이야기를 나는 여태껏 보지 못했다.
선명하게 머리를 울리는 첫 에피소드 이후로도 요시나가 후미는 짧지만 농밀한 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어딘가 결여되어 나쁜 남자에게만 매달리는 수줍은 여대생의 한숨 나오는 이야기도 있고, 사랑을 듬뿍 받아 마땅한 멋진 여자이지만 정작 누군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인 내 친구의 이야기도 있다. 멋진 독립 여성이 되겠다 꿈꾸었지만 이제는 그 꿈을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친구의 뒷모습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또 그래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쓴 침을 꿀떡 삼키고 웃으며, 어디선가 꿈을 향해 우직하게 살고 있는 다른 친구의 이야기에 기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 친구들의 이야기도 당연히 그려낸다. 왜냐면 이건 여자들의 이야기거든. 그렇다면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엄마의 엄마 이야기다. 소위 예쁘고 싸가지 없는 공주병 친구에게 받은 못생긴 얼굴에 대한 할머니의 상처는 ‘예쁘다’ 소리 한번 못들어 본 엄마의 오래된 트라우마로 이어진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할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라고나 할까.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절대 울지 않을거라 얘기하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 장례식에서 펑펑 울거야’ 라고 말해주는 딸은 그 오래된 트라우마를 감싸고 보듬는 존재이다. 아아, 이것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딸이자 여자들의 이야기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다시 읽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날씨가 너무 따뜻해 엄마. 살은 좀 빠졌냐 라고 ‘얘가 저러다 노처녀로 혼자 사는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걱정을 섞어가며 되물으시는 엄마는 여전하다.
비밀이 생기고 독립적인 생활이 생기고 엄마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다. 그리고 새로이 베스트 프렌드를 얻었다. 이것이 엄마와 딸의 불가사의한 관계.
만화는 너무 가볍다고, 현실성 없는 신데렐라 얘기만 늘어놓을 뿐이라고 여기는 우리 큰 딸들에게 이 만화와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을 권한다.
# by | 2006/09/01 16:33 | culture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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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오늘은 알라딘에서 '플라워 오브 라이프3'가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essen / 엄마와 딸이란 그런 것 같아요
퍼플 / 으 플라워 오브 라이프는 아직 못보고 있어요
시리우스 / 빌려드릴까요?
달바람 / 멋지지 아주
둥까 / 절판된 것들은 정말 절망적. 저는 '푸른하늘' 을 구하려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헛수고에요
위~의 분 답글을 보니 나오자마자 바로 산 게 너무 다행이군요.ㅜ_ㅜ
역시 만화책은 살 때 망설이면 안 된다는 진리가...
요시나가후미는 저도 꽤 아끼고 아끼는 만화책이에요^^ - 서양골동양과자점도;
비슷한 분위기로 한혜연씨 만화도 있는데, 역시나 절판입니다 OTL
은빛바람 / 반가워요. 서양골동양과자점, 정말 최고죠
하아, 니야님 포스팅의 타이밍이 최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