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4월 07일
에스빠냐 여행기 - 가우디를 찾는 모험
새벽녘에 내 윗자리와 앞침대의 주인인 듯 보이는 독일 녀석들이 술취한 채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들어와 잠이 깼다. 보통 백인들이 매너도 좋고 공중도덕도 잘 지킬 것이라 믿는 듯 하지만 몇년간의 여행, 특히 도미토리 경험에 의하면 그들은 옆에서 자고 있는 공동 생활자들에 대한 배려가 별로 없다.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 달라 일반화시키기는 그렇지만 젊은 백인 청년들 때문에 불편함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내가 만났던 젊은 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폴의 젊은 여행객들이 훨씬 매너가 좋았다. 그들은 누군가 자고 있으면 발소리를 죽일 줄 알고 욕실을 오래 점거하지 않으며 함부로 벗고 다니거나 자기 물건들을 바닥에 널부러뜨리지도 않는다. 아, 암튼 취해서 들어왔으면 곱게 잘 것이지 노래까지 부르고 난리셔.
그들이 잠든 이후에야 나도 다시 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덕분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게으른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내 윗침대의 그 독일청년은 아예 다리 한짝을 침대밖으로 늘어뜨리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아침의 첫장면이 털이 숭숭난 커다란 발이라니 좀 우습다. 그래도 내 취향으로 생겼으니 어젯밤의 난동을 용서해주마.
오늘도 스타벅스에서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나니 그새 햇살이 아침답지 않게 변했다. 아직 열시밖에 안되었는데도 한국의 한여름 오후 한시의 햇살같다. 선글라스를 끼고 유리문을 밀고나가 정겨운 돌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하루 온종일 가우디와의 데이트다.
첫번째 데이트는 '까사 바뜨요' 였다.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세련된 현대식 거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까사 바뜨요는 번쩍거리는 모던한 건물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단연코 돋보였다. 아니, 그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기운은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티켓값이 너무 비싸서 조금 놀랬지만 - 그래서 밖에서만 보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 여기까지 와서 겉만 보고 쓱 가버리는 건 오히려 미친짓 같다. 차라리 밥을 한끼 굶지. 들어갈 때 분명 영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달라고 했는데 직원이 실수했는지 스페인어만 쏼라쏼라 나온다. 설명은 포기하고 그냥 내 느낌에 집중하기로 한다. 까사 바뜨요는 그야말로 가우디 특유의 곡선이 살아있는 집이었다. 집 자체가 동물의 몸 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부드러움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어디하나 부드럽지 않고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벽을 쓰다듬으며 한층한층 나아간다. 타일조각으로 만든 지붕 테라스가 너무 예쁘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다시 내게 내뿜는다. 원색으로 빛나는 뜨거운 타일조각들을 만져보며 분명 가우디의 몸 한구석에는 소녀적 감성이 웅크리고 있다고 내 맘대로 믿게 되었다.
까사 바뜨요의 옆집인 까사 아마뜨요 역시 그 시대의 출중한 건축물인데 베이커리 샵이 되어있고, 그 옆집인 까사 아마레오나는 로에베 샵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 건물들인데...라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생활 안에 계속적으로 건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아보였다.

까사 바뜨요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러운 창 [T3, 후지 리얼라 100]

어두운 창 [T3, 후지 리얼라 100]

휘감기 [FZ20]

원색의 뜨거운 타일 [T3, 후지 리얼라 100]

동물의 몸속같다 [FZ20]

굴뚝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럽게 우뚝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아마뜨요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바뜨요에서 10분을 걸어가면 나오는 까사밀라. 그 옥상의 굴뚝들은 누구나 한번쯤 사진으로 봤을 법한 초유명한 건물. 역시 그 유명세답게 길게 줄이 늘어섰다. 까사 밀라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길게 늘어선 여행자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구름 한점 없이 투명하게 파란 하늘아래 땀을 흘리며 삼십여분을 기다려 들어간 건물. 지금도 사용되는 층들을 지나쳐 꼭대기 가까운 층들을 개방해놓고 있다.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천재의 번뜩임이란 이런 것이란게 조금씩 전해져오는 것 같다. 부드러운 회벽을 따라 손을 놀리고, 물이 흐르는 방에서는 눈을 감는다. 옥상으로 나가자마자 쏟아지는 햇살의 눈부심에 동공은 고양이처럼 줄어들고 대신 감탄의 소리는 커진다. 투구를 쓰고 웃고있는 듯 보이는 굴뚝들을 지나 부드럽게 파도치는 옥상의 능선을 따라 걸어다녔다. 해를 가려주는 커다란 굴뚝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미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고 여행객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뜻밖에도 내 입에서 나온 노래는 옐로우 서브마린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늘이 너무 파래서였을까, 굴뚝이 잠수함을 연상시켜서였을까.

까사 밀라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밀라의 안쪽 [T3, 후지 리얼라 100]

옥상 [T3, 후지 리얼라 100]

짙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거대한 것 [T3, 후지 리얼라 100]

낯선 풍경 [T3, 후지 리얼라 100]

마음이 풀어진다 [T3, 후지 리얼라 100]

웃는다 [T3, 후지 리얼라 100]

전경 [T3, 후지 리얼라 100]

병정들 [T3, 후지 리얼라 100]

다양한 얼굴들 [T3, 후지 리얼라 100]

물결치다 [T3, 후지 리얼라 100]

빛과 계단 [T3, 후지 리얼라 100]
이번에는 메트로를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지하에서 올라와 내 눈앞에 우뚝 선 성가족성당을 봤을 때, 그 압도적인 기운에 좀 아찔했다. 가우디 천재성의 집대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정교하면서도 자유로운 독창성도 그랬지만, 백년이 넘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그 집념의 건물 앞에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인간의 집념이란 이렇게 지독하고, 또 지독하게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위대함이란 천재성에 지독한 집념이 더해지거나, 아니면 운명적 비극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절한 천재들과 가우디처럼 말이다. 그저 그 앞에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놀랄 뿐이다. 가끔씩 출현하는 살리에리들은 거기에 드라마를 더한다.
JESUS가 유독 빛나는 거대한 활자의 철문부터 투박하지만 애절하게 조각된 사도들, 저 하늘 가까이 탑과 탑의 가로대에 앉아있는 예수상까지 디테일 하나하나가 놓칠 것이 없다. 성당의 앞과 뒤를 한바퀴 돌다보니 이 성당 자체가 숲을 간직한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도적이고 위압스런 앞모습 뒤에는 부드러운 잎사귀로 뒤덮인 숲의 모습이 있다. 공사소리 시끄러운 성당의 내부, 색색의 유리에 비쳐들어오는 햇빛의 영롱함이 컬러풀하게 빛난다. 닿을 수 없을만치 높이 솟은 기둥 끝은 꽃처럼 피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건물의 안정성을 더하는 기능들을 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경외심이 생긴다.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성당의 꼭대기 탑으로 올라간다. 작은 창으로 꽃처럼 빛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탑머리가 보인다. 투터운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휘휘 돌아 다시 내려왔을 때에는 좀 어지러웠다.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이 집념의 본산은 완성될 것인가. 그 완성체를 꼭 두 눈으로 보고싶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첫만남 [T3, 후지 리얼라 100]

거칠고 애절한 Jesus [T3, 후지 리얼라 100]

생각 [T3, 후지 리얼라 100]

무거운 문 [T3, 후지 리얼라 100]

머리위의 빛 [T3, 후지 리얼라 100]

백년째 공사중 [T3, 후지 리얼라 100]

숲처럼 우거진 [T3, 후지 리얼라 100]

하늘, 건축물 [T3, 후지 리얼라 100]

빛과 색 [T3, 후지 리얼라 100]

천정, 꽃 [T3, 후지 리얼라 100]

벽, 빛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럽게 빛나다 [FZ20]

엘리베이터에서 본 풍경 [T3, 후지 리얼라 100]

탑 꼭대기 [T3, 후지 리얼라 100]

꽃 [FZ20]

정면 [T3, 후지 리얼라 100]

높은 곳에 계시다 [FZ20]

완성될 수 있을까 [T3, 후지 리얼라 100]
배고픈 여행객들을 노리며 사그라다파밀리아 문앞에서 쿠폰을 뿌리는 귀여운 언니. 내 손에 쿠폰을 쥐어주는데 보니까 생과일주스+샌드위치가 5.5유로란다. 호오- 상당히 괜찮은 걸. 핑크색 간판이 귀여운 그 가게는 여지없이 쿠폰을 손에 쥔 가난한 여행객들로 북적댔다. 딸기쥬스와 참치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맛있게 오물오물. 아까의 어지럼증이 날아간다. 큰 감동과 집념을 목격하고 난 후에도 역시 배고픔은 찾아오는 것이다. 사진을 너무 버닝하는 바람에 두통을 들고나온 필름이 모두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눈물을 머금고 5유로나 주고 샌드위치 옆 구멍가게에서 코닥 한통을 산다. 역시 필름은 우리나라가 최고 싸.
다시 메트로를 타고 구엘공원에서 제일 가까운 역에 내렸는데, 아우- 구엘공원은 메트로에서 멀구나. 누군가 공원 뒷문에서 가까운 역을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거기서 내릴걸. 뜨겁다못해 뒷목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햇빛을 받으며 경사진 길을 헥헥거리며 오른다. 막 도착한 공원의 입구는 그 유명한, 가우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타일 도마뱀 주변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여유롭고 시원하고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피로가 싹 풀리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넓었던 이 곳은 가우디가 인공적인 느낌은 완전히 배제하고 일일이 돌을 얹고 꼬고 그러면서도 구조적으로 터널과 길들을 만들어 모든 것이 원래 거기 있었던 듯한 자연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생동감있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으로 나무와 자연과 공기를 재료로 빚어낸 가우디의 손길이 느껴진다. 비스듬히 둥근 터널을 지나 꺾어들어가면 또 새로운 곳. 곳곳에 직접 제작한 CD를 늘어놓고 연주를 하고 있는 악사들이 있고 눈을 감고 조용히 음악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간히 박수가 터져나온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도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기타소리가 바람에 실려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와 눈인사를 나누고 바르셀로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바르셀로나에 살고 싶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딱 일년만, 생활에 복닥거리지 않은 채 언어를 배우고 공부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들고 바닷가에 나가거나 여기 구엘 공원에 오거나 그러면서 딱 일년만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이 천재의 도시에, 가난한 예술가들의 도시에 발을 담그고 싶다.

구엘공원 입구 [T3, 코닥 200]

타일 도마뱀 [FZ20]

부드러운 기분, 기타 [T3, 코닥 200]

돌로 쌓아올린 터널 [T3, 코닥 200]

나무기둥같다 [FZ20]

아름다운 음악가들 [T3, 코닥 200]

헤에- 좋아요 [T3, 코닥 200]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T3, 코닥 200]

꼬마, 빛나는 벤치 [FZ20]

셀프 [T3, 코닥 200]

동화같아 [T3, 코닥 200]

기울다 [T3, 코닥 200]

바이올린 연주자 [T3, 코닥 200]
7시가 다 되도록 공원을 떠나지 못하다가 시원한 저녁의 바람이 불어서야 그제서야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이 좋은 기분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서 나는 다시 항구로 향했다. 포트벨에서 밤이 내리는 것을 보고 걸어서 돌아가야지. 일요일의 항구는 한참 카니발로 북적였다. 영화 '빅' 에 나오는 것 같은 작고 촌스런 놀이기구와 인형뽑기기계, 그리고 어른들이 잔뜩 열을 올리고 있는 거대 빙고게임이 한참이었다. 그득히 쌓여있는 빙고 상품중에 갖고싶던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발견하고는 나도 1유로를 내고 빙고 카드를 받았다. 뭐, 물론 내가 원하는대로 숫자는 나오지 않았고 한 노부부가 빙고를 외치며 커다란 가전제품 선물을 받아갔다. 다들 즐거워보인다.
해변에는 어제 없었던 무대가 섰고 석양에 맞추어 신나는 까딸루냐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이 막 시작되었다. 기타 소리가 듣기 좋은 스페인의 노래에 레게 리듬이 섞인듯한 신나는 음악. 열정의 나라답게 공연이 시작되자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선은 흔들흔들 움직이며 구경하고 있던 내게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놀고 있는 일군의 청년들이 다가왔다. 어색한 영어로 아르헨티나에서 온 친구들이라며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내게 같이 놀자며 권했고 결국 맥주 한병을 얻어 마시고는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해변의 모래가 신발로 파고들고 내 손을 잡고 신나게 춤추고 있는 청년의 땀냄새가 진해지기 시작한다. 모두가 함께 즐거웠고 그 안에서 나는 무척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입꼬리의 무게도 같이 가벼워진다. 웃음이 커진다. 진정으로 즐거웠다.
두시간여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이미 바다 너머로 해는 사라졌다. 아르헨티나 청년들은 다시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볼에 가볍게 키스하며 그들과 안녕.

항구 가득한 요트 [T3, 코닥 200]

카니발 [T3, 코닥 200]

빙고! [T3, 코닥 200]

해가지는 해변 [T3, 코닥 200]
가까운 가게에서 맥주를 두캔 사고, 해변의 핫도그 가게에서 칠리 핫도그를 사서 모래밭에 앉아 먹는다. 맥주와 모히토를 파는 노천의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해가 진 바다를 보면서 맨발을 모래에 파묻고 마시는 맥주 한모금, 싸구려 핫도그 한입은 별 다섯개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풀코스 디너보다 백배는 더 맛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맛은 혀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바로 흘러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갑자기 문득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 기분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조금 외롭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맥주와 핫도그와 맨발의 모래와 약간은 외로운 모순된 기분이 뒤섞여 나는 행복의 한계단을 올라섰다. 지금 이 시간은 인생에 기억할만한 순간임을 직감으로 알았다. 여기를 기점으로 나는 더 행복해졌고, 그것을 알았으니 다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닷 바람에 어느새 땀은 날아갔고 모래의 온기도 식어 나는 발을 털고 신발을 다시 신었다. 천천히 바다에서 등을 돌려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다. 오늘의 모든 장면을 리와인드하고 바닷가에서 멈추었다. 인생의 비밀을 발견한 그 순간을 사진 찍는다.
그들이 잠든 이후에야 나도 다시 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덕분에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게으른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내 윗침대의 그 독일청년은 아예 다리 한짝을 침대밖으로 늘어뜨리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아침의 첫장면이 털이 숭숭난 커다란 발이라니 좀 우습다. 그래도 내 취향으로 생겼으니 어젯밤의 난동을 용서해주마.
오늘도 스타벅스에서 베이글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나니 그새 햇살이 아침답지 않게 변했다. 아직 열시밖에 안되었는데도 한국의 한여름 오후 한시의 햇살같다. 선글라스를 끼고 유리문을 밀고나가 정겨운 돌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하루 온종일 가우디와의 데이트다.
첫번째 데이트는 '까사 바뜨요' 였다.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세련된 현대식 거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까사 바뜨요는 번쩍거리는 모던한 건물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단연코 돋보였다. 아니, 그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기운은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티켓값이 너무 비싸서 조금 놀랬지만 - 그래서 밖에서만 보는 사람들이 많았나보다 - 여기까지 와서 겉만 보고 쓱 가버리는 건 오히려 미친짓 같다. 차라리 밥을 한끼 굶지. 들어갈 때 분명 영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달라고 했는데 직원이 실수했는지 스페인어만 쏼라쏼라 나온다. 설명은 포기하고 그냥 내 느낌에 집중하기로 한다. 까사 바뜨요는 그야말로 가우디 특유의 곡선이 살아있는 집이었다. 집 자체가 동물의 몸 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부드러움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어디하나 부드럽지 않고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벽을 쓰다듬으며 한층한층 나아간다. 타일조각으로 만든 지붕 테라스가 너무 예쁘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 다시 내게 내뿜는다. 원색으로 빛나는 뜨거운 타일조각들을 만져보며 분명 가우디의 몸 한구석에는 소녀적 감성이 웅크리고 있다고 내 맘대로 믿게 되었다.
까사 바뜨요의 옆집인 까사 아마뜨요 역시 그 시대의 출중한 건축물인데 베이커리 샵이 되어있고, 그 옆집인 까사 아마레오나는 로에베 샵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인 건물들인데...라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생활 안에 계속적으로 건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좋아보였다.

까사 바뜨요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러운 창 [T3, 후지 리얼라 100]

어두운 창 [T3, 후지 리얼라 100]

휘감기 [FZ20]

원색의 뜨거운 타일 [T3, 후지 리얼라 100]

동물의 몸속같다 [FZ20]

굴뚝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럽게 우뚝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아마뜨요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바뜨요에서 10분을 걸어가면 나오는 까사밀라. 그 옥상의 굴뚝들은 누구나 한번쯤 사진으로 봤을 법한 초유명한 건물. 역시 그 유명세답게 길게 줄이 늘어섰다. 까사 밀라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길게 늘어선 여행자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구름 한점 없이 투명하게 파란 하늘아래 땀을 흘리며 삼십여분을 기다려 들어간 건물. 지금도 사용되는 층들을 지나쳐 꼭대기 가까운 층들을 개방해놓고 있다.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천재의 번뜩임이란 이런 것이란게 조금씩 전해져오는 것 같다. 부드러운 회벽을 따라 손을 놀리고, 물이 흐르는 방에서는 눈을 감는다. 옥상으로 나가자마자 쏟아지는 햇살의 눈부심에 동공은 고양이처럼 줄어들고 대신 감탄의 소리는 커진다. 투구를 쓰고 웃고있는 듯 보이는 굴뚝들을 지나 부드럽게 파도치는 옥상의 능선을 따라 걸어다녔다. 해를 가려주는 커다란 굴뚝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미 미지근해진 물을 마시고 여행객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뜻밖에도 내 입에서 나온 노래는 옐로우 서브마린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늘이 너무 파래서였을까, 굴뚝이 잠수함을 연상시켜서였을까.

까사 밀라 [T3, 후지 리얼라 100]

까사 밀라의 안쪽 [T3, 후지 리얼라 100]

옥상 [T3, 후지 리얼라 100]

짙푸른 하늘과 부드러운 거대한 것 [T3, 후지 리얼라 100]

낯선 풍경 [T3, 후지 리얼라 100]

마음이 풀어진다 [T3, 후지 리얼라 100]

웃는다 [T3, 후지 리얼라 100]

전경 [T3, 후지 리얼라 100]

병정들 [T3, 후지 리얼라 100]

다양한 얼굴들 [T3, 후지 리얼라 100]

물결치다 [T3, 후지 리얼라 100]

빛과 계단 [T3, 후지 리얼라 100]
이번에는 메트로를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지하에서 올라와 내 눈앞에 우뚝 선 성가족성당을 봤을 때, 그 압도적인 기운에 좀 아찔했다. 가우디 천재성의 집대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정교하면서도 자유로운 독창성도 그랬지만, 백년이 넘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그 집념의 건물 앞에서 나는 할말을 잃었다. 인간의 집념이란 이렇게 지독하고, 또 지독하게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위대함이란 천재성에 지독한 집념이 더해지거나, 아니면 운명적 비극이 더해져야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절한 천재들과 가우디처럼 말이다. 그저 그 앞에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며 놀랄 뿐이다. 가끔씩 출현하는 살리에리들은 거기에 드라마를 더한다.
JESUS가 유독 빛나는 거대한 활자의 철문부터 투박하지만 애절하게 조각된 사도들, 저 하늘 가까이 탑과 탑의 가로대에 앉아있는 예수상까지 디테일 하나하나가 놓칠 것이 없다. 성당의 앞과 뒤를 한바퀴 돌다보니 이 성당 자체가 숲을 간직한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도적이고 위압스런 앞모습 뒤에는 부드러운 잎사귀로 뒤덮인 숲의 모습이 있다. 공사소리 시끄러운 성당의 내부, 색색의 유리에 비쳐들어오는 햇빛의 영롱함이 컬러풀하게 빛난다. 닿을 수 없을만치 높이 솟은 기둥 끝은 꽃처럼 피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건물의 안정성을 더하는 기능들을 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경외심이 생긴다.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성당의 꼭대기 탑으로 올라간다. 작은 창으로 꽃처럼 빛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탑머리가 보인다. 투터운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휘휘 돌아 다시 내려왔을 때에는 좀 어지러웠다.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이 집념의 본산은 완성될 것인가. 그 완성체를 꼭 두 눈으로 보고싶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첫만남 [T3, 후지 리얼라 100]

거칠고 애절한 Jesus [T3, 후지 리얼라 100]

생각 [T3, 후지 리얼라 100]

무거운 문 [T3, 후지 리얼라 100]

머리위의 빛 [T3, 후지 리얼라 100]

백년째 공사중 [T3, 후지 리얼라 100]

숲처럼 우거진 [T3, 후지 리얼라 100]

하늘, 건축물 [T3, 후지 리얼라 100]

빛과 색 [T3, 후지 리얼라 100]

천정, 꽃 [T3, 후지 리얼라 100]

벽, 빛 [T3, 후지 리얼라 100]

부드럽게 빛나다 [FZ20]

엘리베이터에서 본 풍경 [T3, 후지 리얼라 100]

탑 꼭대기 [T3, 후지 리얼라 100]

꽃 [FZ20]

정면 [T3, 후지 리얼라 100]

높은 곳에 계시다 [FZ20]

완성될 수 있을까 [T3, 후지 리얼라 100]
배고픈 여행객들을 노리며 사그라다파밀리아 문앞에서 쿠폰을 뿌리는 귀여운 언니. 내 손에 쿠폰을 쥐어주는데 보니까 생과일주스+샌드위치가 5.5유로란다. 호오- 상당히 괜찮은 걸. 핑크색 간판이 귀여운 그 가게는 여지없이 쿠폰을 손에 쥔 가난한 여행객들로 북적댔다. 딸기쥬스와 참치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맛있게 오물오물. 아까의 어지럼증이 날아간다. 큰 감동과 집념을 목격하고 난 후에도 역시 배고픔은 찾아오는 것이다. 사진을 너무 버닝하는 바람에 두통을 들고나온 필름이 모두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눈물을 머금고 5유로나 주고 샌드위치 옆 구멍가게에서 코닥 한통을 산다. 역시 필름은 우리나라가 최고 싸.
다시 메트로를 타고 구엘공원에서 제일 가까운 역에 내렸는데, 아우- 구엘공원은 메트로에서 멀구나. 누군가 공원 뒷문에서 가까운 역을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거기서 내릴걸. 뜨겁다못해 뒷목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햇빛을 받으며 경사진 길을 헥헥거리며 오른다. 막 도착한 공원의 입구는 그 유명한, 가우디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타일 도마뱀 주변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주변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여유롭고 시원하고 아름다운 공원이었다. 피로가 싹 풀리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넓었던 이 곳은 가우디가 인공적인 느낌은 완전히 배제하고 일일이 돌을 얹고 꼬고 그러면서도 구조적으로 터널과 길들을 만들어 모든 것이 원래 거기 있었던 듯한 자연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생동감있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으로 나무와 자연과 공기를 재료로 빚어낸 가우디의 손길이 느껴진다. 비스듬히 둥근 터널을 지나 꺾어들어가면 또 새로운 곳. 곳곳에 직접 제작한 CD를 늘어놓고 연주를 하고 있는 악사들이 있고 눈을 감고 조용히 음악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간히 박수가 터져나온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도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다. 기타소리가 바람에 실려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와 눈인사를 나누고 바르셀로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바르셀로나에 살고 싶다고 다시 한번 생각한다. 딱 일년만, 생활에 복닥거리지 않은 채 언어를 배우고 공부를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들고 바닷가에 나가거나 여기 구엘 공원에 오거나 그러면서 딱 일년만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이 천재의 도시에, 가난한 예술가들의 도시에 발을 담그고 싶다.

구엘공원 입구 [T3, 코닥 200]
타일 도마뱀 [FZ20]

부드러운 기분, 기타 [T3, 코닥 200]

돌로 쌓아올린 터널 [T3, 코닥 200]

나무기둥같다 [FZ20]

아름다운 음악가들 [T3, 코닥 200]

헤에- 좋아요 [T3, 코닥 200]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T3, 코닥 200]

꼬마, 빛나는 벤치 [FZ20]

셀프 [T3, 코닥 200]

동화같아 [T3, 코닥 200]

기울다 [T3, 코닥 200]

바이올린 연주자 [T3, 코닥 200]
7시가 다 되도록 공원을 떠나지 못하다가 시원한 저녁의 바람이 불어서야 그제서야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이 좋은 기분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서 나는 다시 항구로 향했다. 포트벨에서 밤이 내리는 것을 보고 걸어서 돌아가야지. 일요일의 항구는 한참 카니발로 북적였다. 영화 '빅' 에 나오는 것 같은 작고 촌스런 놀이기구와 인형뽑기기계, 그리고 어른들이 잔뜩 열을 올리고 있는 거대 빙고게임이 한참이었다. 그득히 쌓여있는 빙고 상품중에 갖고싶던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발견하고는 나도 1유로를 내고 빙고 카드를 받았다. 뭐, 물론 내가 원하는대로 숫자는 나오지 않았고 한 노부부가 빙고를 외치며 커다란 가전제품 선물을 받아갔다. 다들 즐거워보인다.
해변에는 어제 없었던 무대가 섰고 석양에 맞추어 신나는 까딸루냐 음악을 연주하는 공연이 막 시작되었다. 기타 소리가 듣기 좋은 스페인의 노래에 레게 리듬이 섞인듯한 신나는 음악. 열정의 나라답게 공연이 시작되자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선은 흔들흔들 움직이며 구경하고 있던 내게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놀고 있는 일군의 청년들이 다가왔다. 어색한 영어로 아르헨티나에서 온 친구들이라며 자신들을 소개한다. 그들은 내게 같이 놀자며 권했고 결국 맥주 한병을 얻어 마시고는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해변의 모래가 신발로 파고들고 내 손을 잡고 신나게 춤추고 있는 청년의 땀냄새가 진해지기 시작한다. 모두가 함께 즐거웠고 그 안에서 나는 무척 가벼워졌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입꼬리의 무게도 같이 가벼워진다. 웃음이 커진다. 진정으로 즐거웠다.
두시간여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이미 바다 너머로 해는 사라졌다. 아르헨티나 청년들은 다시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볼에 가볍게 키스하며 그들과 안녕.

항구 가득한 요트 [T3, 코닥 200]

카니발 [T3, 코닥 200]

빙고! [T3, 코닥 200]

해가지는 해변 [T3, 코닥 200]
가까운 가게에서 맥주를 두캔 사고, 해변의 핫도그 가게에서 칠리 핫도그를 사서 모래밭에 앉아 먹는다. 맥주와 모히토를 파는 노천의 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해가 진 바다를 보면서 맨발을 모래에 파묻고 마시는 맥주 한모금, 싸구려 핫도그 한입은 별 다섯개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풀코스 디너보다 백배는 더 맛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맛은 혀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바로 흘러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갑자기 문득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 기분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조금 외롭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세계 최고의 맥주와 핫도그와 맨발의 모래와 약간은 외로운 모순된 기분이 뒤섞여 나는 행복의 한계단을 올라섰다. 지금 이 시간은 인생에 기억할만한 순간임을 직감으로 알았다. 여기를 기점으로 나는 더 행복해졌고, 그것을 알았으니 다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닷 바람에 어느새 땀은 날아갔고 모래의 온기도 식어 나는 발을 털고 신발을 다시 신었다. 천천히 바다에서 등을 돌려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다. 오늘의 모든 장면을 리와인드하고 바닷가에서 멈추었다. 인생의 비밀을 발견한 그 순간을 사진 찍는다.
# by | 2007/04/07 15:10 | 지구정복자료수집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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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세포를 자극하는데 사진 또한 한몫하고 있다.
에스빠냐 아니더라도 땅끝마을이라도 가고싶어요.
첫비행 / 분명 좋아하실거에요
서산돼지 / 까바! 으으- 그 노천바에서 마시는 까바가 너무 좋았어요
마르스 / 진짜. 리얼리. 바르셀로나는 멋져요
시리우스 / 음- 그게 젊은 여행자들은 좀 그래요.
달바람 / 응. 너무 멋지지
djsolmi / 남해여행 가는 모임 만들까?
사진을 잘 찍으시네요. ^ ^
로망자 / 저두요
실제적인 감동은- 진짜 멋진 예술품에서만 풍기는 아우라..덜덜덜
그나저나 스페인의 하늘은 항상 파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