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4월 12일
에스빠냐 여행기 - 몬세랏
눈을 떠보니 알람이 맞춰져있던 시간보다 한시간이 지나있었다. 어머! 오늘은 몬세랏에 갔다오는 날이라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은데 이를 어쩌나. 여유롭게 즐기는 아침식사는 포기해야겠다. 어젯밤에도 그 독일 녀석들은 새벽 세시가 넘어서 들어와서는 '아임 쏘리 아임 드렁큰'을 연발하며 사람들을 모두 깨웠다. 조금 짜증이 났지만 놀러와서 기분 좋다는데 그렇게 놀도록 놔둬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들 조금은 붕 떠있는 상태니까,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 여행을 다니는 동안은 조금씩 착해진다.
서둘러 씻고 크로스 백을 둘러매고는 에스빠냐 역으로 향했다. 에스빠냐 역에서 '트랜스 몬세랏' 이라는 티켓을 파는데 몬세랏까지 왕복 열차와 수도원이 위치한 산꼭대기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포함되어 있다. 친절한 직원이 자세하게 안내해주어 헤매지 않고 무사히 티켓 구입. 몬세랏은 바르셀로나에서 R5 FGC를 타고 한시간 가량 가면 나오는데 산꼭대기 절벽 위에 자리잡은 오래된 바실리카 성당이 유명하다. 이 바실리카가 유명한 건 그 위치와 죽여주는 풍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Black Maria' 가 모셔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깔끔한 교외선에 오르니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근교로 소풍가는 기분이 들어 점점 신났다. 덜컹덜컹 참 잘도 간다.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높은 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저기 몬세랏이 보일 무렵, 사람들이 우루루루 내린다. 뭐, 나도 눈치껏 여긴갑네- 하고 따라 내렸는데 아뿔싸. 내가 산 티켓은 새로 만든 까~어쩌구저쩌구하는 새 열차가 포함된 티켓인데 그걸 타려면 한정거장을 더 가서 내려야하고 여기는 낡은 케이블카로 몬세랏을 올라가는 역이란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포기는 빠를 수록 좋다. 그래, 낡고 낑낑대는 케이블카도 욕심이 났었으니 한번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티켓값도 별로 비싸지 않으니 괜찮아. 노랗고 낡은 케이블카에 올라가 계곡 사이에 걸쳐진 쇠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천천히 올라간다. 발밑이 아찔하다. 이거, 괜찮은데!

덜컹덜컹 케이블카를 타고 [FZ20]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절벽 바로 위에 커다란 암석을 배경으로 서있는 수도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인포에서 주는 지도를 받아드니 지금까지도 수도원으로 운영되는 건물과 바실리카 말고도 두개의 Funicular(밧줄로 작동되는 산악열차)를 타고 이제는 허물어져버린 작고 낡은 수도원들로 갈 수 있는 모양이다. 하루종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우선은 바실리카를 한바퀴 돈다. 누구의 묘인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묘를 지나 성당 내부부터 타일로 만든 마리아 앞에 높여진 촛불들까지 돌아본다. 몬세랏은 스페인에 와서 가장 많은 단체 관광객을 본 곳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믿음 깊은 사람들을 가장 많이 본 곳이기도 하다. 다들 초에 정성스레 불을 붙이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면 여기는 어떤 분위기일까. 조용하고 성스러운 공기가 계곡을 타고 올라와 휘돌지 않을까.
아침을 못먹었더니 배가 꼬르륵 거리며 고요한 명상을 자꾸 훼방놓았다. 몬세랏 유일의 까페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기에 옆의 작은 매점으로 가 그나마 요기가 될만한 맛없어 보이는 빵과 물을 샀다. 앞마당 나무 그늘에 앉아 조금 딱딱하지만 생각보단 맛있는 빵을 씹고 물을 홀짝이며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갑자기 컵라면과 삼각김밥 생각이 난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높은 곳에서 먹는 따끈한 컵라면은 정말 최고인데 말이다.
어느 새 한시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1시면 유명한 소년 합창단의 성가 공연이 있는 시간이다. 바실리카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찼고 모두들 카메라를 꺼내들고 웅성대고 있었다. 신부님이 나와 우선은 에스빠뇰로 오늘 부를 노래들을 소개했고, 연이어 더듬더듬 영어로 안내를 해주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랫소리. 웅성거림은 빠르게 잦아들고 바실리카 천장까지 찬송가가 울려퍼졌다. 소년들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부드러워 작고 보들한 손등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저 위로 검은 마리아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모습을 한 마리아는 검은 아기 예수를 안고 여왕처럼 앉아있다. 그 기묘함이 사람들을 이리 불러모으는지도 모른다.
공연이 끝나고 바실리카 안마당으로 나오니 또다른 찬송팀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엔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성가대보다 좀 더 밝고 활기찼으며 즐거워보였다. 발을 구르기도 하고 간단한 율동을 선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아카펠라를 듣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몬세랏 [T3, 후지 오토오토 200]

올려다보면 [T3, 후지 오토오토 200]

묘 [T3, 후지 오토오토 200]

양초 [FZ20]

블랙 마리아 [FZ20]

바실리카 [T3, 후지 오토오토 200]

찬송 [FZ20]
찬송팀을 뒤로하고 나오니 Saint Joan으로 가는 Funicular의 출발시간이 1분 남았다. 가방을 바짝 매고 마지막으로 올라탔더니 바로 닫히는 문.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열차의 투명한 아크릴 지붕 위로 보이는 산의 풍광이 그야말로 짙고 깊었다. 15분쯤 올랐을까, 꼭대기에 도착했는지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정거장 바로 앞에 Saint Joan 수도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 여긴 아무것도 없네. 물론,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끝내줬지만.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저기 능선의 저 끝에 무언가 건물이 보인다. 표지판을 찾았다. Saint Joan, 여기서부터 걸어서 40분.
그냥 funicular 정거장 주변에서 노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저 능선 끝까지 갈 맘을 먹는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높은 곳에서만 부는 특유의 산바람을 맞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좁은 능선길 바로 아래는 절벽 낭떠러지였고 모래들로 길은 미끄러웠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따가운 햇빛이 볼을 때리고, 산바람에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갸날프게 흔들린다. 짙은 녹음과 함께 굴곡진 산과 저 멀리까지 보이는 풍경은 카메라를 잡은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잠시 능선에서 벗어나 비탈에 발을 걸고 쉬다가 다시 걸어 드디어 위태롭게 서있는 허물어진 수도원에 도달한다. 창문도 다 떨어져나가고 낙서자국 가득한 오래된 수도원. 켜켜히 쌓인 시간의 흐름과 손길이 닿지 않는 버려진 곳의 애처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곳. 그와 함께 건물 바로 뒤에 우뚝 선 담처럼 버티고 있는 바위절벽이 살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흙먼지로 덮혀진 계단을 딛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이 곳을 독점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 여행객 하나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이 뭐가 필요하겠나.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서.
저기 멀리 부녀로 보이는 두명의 여행객이 이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나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간간히 뒤돌아 보면서.

저기 Saint Joan [T3, 후지 오토오토 200]

올려다보면 [T3, 후지 오토오토 200]

우뚝 [T3, 후지 오토오토 200]

앙상하게 [T3, 후지 오토오토 200]

버려진 것 [T3, 후지 오토오토 200]

창문 [FZ20]

계단 [FZ20]

옥상 [T3, 후지 오토오토 200]

바위 [T3, 후지 오토오토 200]

내려다본다 [T3, 후지 오토오토 200]

셀프컷 [FZ20]

바람에 마르다 [T3, 후지 오토오토 200]

이런 풍경이 보이는 길 [T3, 후지 오토오토 200]
다시 Funicular를 타고 내려와 이번엔 아래쪽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 Saint Miguel로 가보려 했지만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기차시각이 영 마음에 걸린다. 산 미구엘 쪽을 다녀오려면 최소 두시간은 걸린다고 하던데. 조금 고민하다가 그쪽은 포기하고 미처 돌아보지 못한 주변을 산책한다. 산쪽으로 난 산책로에는 조용한 곳을 찾아온 수녀님과 몇몇 여행객들과 고양이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잎이 유난히 짙은 초록색을 띄고 있는 이곳에는 곳곳에 성자들의 동상이 서있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숲 속의 마리아 [FZ20]

고양이 둘 [FZ20]

그루밍 삼매경 [FZ20]

수사 [T3, 후지 오토오토 200]

안녕- [FZ20]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수도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벽돌 한장 무게의 묵직한 초콜릿 바를 세개 산다. 친구들에게 전해줄 그 달콤하고 무거운 선물을 손에 쥐고 이번엔 케이블카가 아니라 신식 열차를 타고 몬세랏을 내려간다. 그 안에서 우연히 두달 동안 유럽을 여행중인 한국 여자애를 만났다. 한국 민박에 묵고 있다는데 론다에서 만난 그 언니도 거기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쩐지 반가운 기분. 4시 6분에 플랫폼에 도착한 R5 FGC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한다. 올때는 혼자였는데 돌아갈 때는 동행이 생겼고 초콜렛 세개 만큼 가방도 더 무거워졌다.
에스빠냐 역에 도착할 때까지 오랫만에 한국말로 실컷 떠들었더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 역에서 그 아이와는 안녕하고 나는 내일 까다께스로 갈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북부 터미널에 잠깐 들렀다. 까다께스로 가는 버스는 하루 두번. 정말 깡촌이다. 달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 수 없었을 그 곳으로 내일 오전에 떠나는 버스표를 받아들고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묵직한 초콜렛 등을 내려놓을 심산으로 들어간 방에는 새로 일본인 청년이 짐을 풀고 있었다. 나름 며칠 먼저 도착한 선배라고 지도를 놓고 몬쥬익에 가는 방법과 해변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는 좋은 웃음을 보여주어서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저절로 발걸음이 항구와 해변쪽으로 향했다. 오늘의 람블라스 거리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시계를 달고있는 청동분장을 한 마임니스트, 나무 요정으로 분한 퍼포먼서, 멋드러진 탱고를 추는 남녀와 해골 인형을 다루는 인형사까지 거리는 아마추어 예술가와 관객의 웃음소리와 동전 던지는 소리로 활기에 넘친다. 그 활기찬 거리를 아껴가며 걸어 항구에 닿는다. 파도처럼 너울치는 다리인 '람블라 드 마르'를 건너 쇼핑몰을 한바퀴 둘러보며 부탁받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우선 찜해놓고 나와 다시 항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흥겨운 리듬.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들은 4인조 레게 밴드였다. 어둑해오는 항구에 정박된 수백대의 요트를 뒷배경으로 그들은 바다 냄새가 나는 흥겨운 레게를 연주했고 나는 어느새 가장 앞줄에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어두워져 잘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은 계속 연주했고 그렇게 삼십분을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마지막 곡을 끝내고 나는 브라보!를 외쳤고 그들은 내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레게에는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 바다에서 듣는 레게는 더 그렇다.

시계를 단 마임니스트 [T3, 후지 오토오토 200]

나무여인 [FZ20]

탱고 [FZ20]

람블라 드 마르 [T3, 후지 오토오토 200]

해가 지다 [FZ20]
해변 한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식당에서 빠에야와 맥주를 주문했다. 분명 소금은 넣지 말라고 했는데도 빠에야가 너무 짜다. 맛있는데 너무 짜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대신 맥주는 최고로 시원했으니 뭐 눈감아 주기로 하자. 어제 맥주를 샀던 마트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오렌지를 사서 달랑달랑 봉지를 흔들며 완전히 깜깜해진 길을 다시 걸었다. 이제 람블라스 거리는 컬러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이런저런 물건을 대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불고 번지게 만드니 믿을 수 없이 정교한 그림들이 탄생한다. 그림보다 스프레이로 그런 걸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신기했다. 그림 한장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아마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지.

밤의 해변 [FZ20]

개구리 피아니스트 [FZ20]

스프레이로 그린 그림들 [FZ20]
다시 짐을 챙겨야 할 때. 내일 아침을 대비해 배낭을 차곡차곡 다시 싼다. 어느 새 떠나올 때보다 이것저것 많이 늘어났다. 여행의 막바지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서둘러 씻고 크로스 백을 둘러매고는 에스빠냐 역으로 향했다. 에스빠냐 역에서 '트랜스 몬세랏' 이라는 티켓을 파는데 몬세랏까지 왕복 열차와 수도원이 위치한 산꼭대기까지 운행하는 열차가 포함되어 있다. 친절한 직원이 자세하게 안내해주어 헤매지 않고 무사히 티켓 구입. 몬세랏은 바르셀로나에서 R5 FGC를 타고 한시간 가량 가면 나오는데 산꼭대기 절벽 위에 자리잡은 오래된 바실리카 성당이 유명하다. 이 바실리카가 유명한 건 그 위치와 죽여주는 풍광 때문이기도 하지만 'Black Maria' 가 모셔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깔끔한 교외선에 오르니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근교로 소풍가는 기분이 들어 점점 신났다. 덜컹덜컹 참 잘도 간다.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높은 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저기 몬세랏이 보일 무렵, 사람들이 우루루루 내린다. 뭐, 나도 눈치껏 여긴갑네- 하고 따라 내렸는데 아뿔싸. 내가 산 티켓은 새로 만든 까~어쩌구저쩌구하는 새 열차가 포함된 티켓인데 그걸 타려면 한정거장을 더 가서 내려야하고 여기는 낡은 케이블카로 몬세랏을 올라가는 역이란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포기는 빠를 수록 좋다. 그래, 낡고 낑낑대는 케이블카도 욕심이 났었으니 한번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티켓값도 별로 비싸지 않으니 괜찮아. 노랗고 낡은 케이블카에 올라가 계곡 사이에 걸쳐진 쇠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천천히 올라간다. 발밑이 아찔하다. 이거, 괜찮은데!

덜컹덜컹 케이블카를 타고 [FZ20]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절벽 바로 위에 커다란 암석을 배경으로 서있는 수도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인포에서 주는 지도를 받아드니 지금까지도 수도원으로 운영되는 건물과 바실리카 말고도 두개의 Funicular(밧줄로 작동되는 산악열차)를 타고 이제는 허물어져버린 작고 낡은 수도원들로 갈 수 있는 모양이다. 하루종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우선은 바실리카를 한바퀴 돈다. 누구의 묘인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묘를 지나 성당 내부부터 타일로 만든 마리아 앞에 높여진 촛불들까지 돌아본다. 몬세랏은 스페인에 와서 가장 많은 단체 관광객을 본 곳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믿음 깊은 사람들을 가장 많이 본 곳이기도 하다. 다들 초에 정성스레 불을 붙이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밤이 찾아오면 여기는 어떤 분위기일까. 조용하고 성스러운 공기가 계곡을 타고 올라와 휘돌지 않을까.
아침을 못먹었더니 배가 꼬르륵 거리며 고요한 명상을 자꾸 훼방놓았다. 몬세랏 유일의 까페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기에 옆의 작은 매점으로 가 그나마 요기가 될만한 맛없어 보이는 빵과 물을 샀다. 앞마당 나무 그늘에 앉아 조금 딱딱하지만 생각보단 맛있는 빵을 씹고 물을 홀짝이며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갑자기 컵라면과 삼각김밥 생각이 난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부는 높은 곳에서 먹는 따끈한 컵라면은 정말 최고인데 말이다.
어느 새 한시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1시면 유명한 소년 합창단의 성가 공연이 있는 시간이다. 바실리카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찼고 모두들 카메라를 꺼내들고 웅성대고 있었다. 신부님이 나와 우선은 에스빠뇰로 오늘 부를 노래들을 소개했고, 연이어 더듬더듬 영어로 안내를 해주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랫소리. 웅성거림은 빠르게 잦아들고 바실리카 천장까지 찬송가가 울려퍼졌다. 소년들의 목소리는 아름답고 부드러워 작고 보들한 손등으로 뺨을 어루만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저 위로 검은 마리아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모습을 한 마리아는 검은 아기 예수를 안고 여왕처럼 앉아있다. 그 기묘함이 사람들을 이리 불러모으는지도 모른다.
공연이 끝나고 바실리카 안마당으로 나오니 또다른 찬송팀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엔 젊은 청년들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성가대보다 좀 더 밝고 활기찼으며 즐거워보였다. 발을 구르기도 하고 간단한 율동을 선보이기도 하는 이들의 아카펠라를 듣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몬세랏 [T3, 후지 오토오토 200]

올려다보면 [T3, 후지 오토오토 200]

묘 [T3, 후지 오토오토 200]

양초 [FZ20]

블랙 마리아 [FZ20]

바실리카 [T3, 후지 오토오토 200]

찬송 [FZ20]
찬송팀을 뒤로하고 나오니 Saint Joan으로 가는 Funicular의 출발시간이 1분 남았다. 가방을 바짝 매고 마지막으로 올라탔더니 바로 닫히는 문.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열차의 투명한 아크릴 지붕 위로 보이는 산의 풍광이 그야말로 짙고 깊었다. 15분쯤 올랐을까, 꼭대기에 도착했는지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정거장 바로 앞에 Saint Joan 수도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 여긴 아무것도 없네. 물론,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끝내줬지만.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저기 능선의 저 끝에 무언가 건물이 보인다. 표지판을 찾았다. Saint Joan, 여기서부터 걸어서 40분.
그냥 funicular 정거장 주변에서 노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저 능선 끝까지 갈 맘을 먹는 사람은 나뿐인가 보다. 높은 곳에서만 부는 특유의 산바람을 맞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좁은 능선길 바로 아래는 절벽 낭떠러지였고 모래들로 길은 미끄러웠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따가운 햇빛이 볼을 때리고, 산바람에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갸날프게 흔들린다. 짙은 녹음과 함께 굴곡진 산과 저 멀리까지 보이는 풍경은 카메라를 잡은 손을 바쁘게 만들었다. 잠시 능선에서 벗어나 비탈에 발을 걸고 쉬다가 다시 걸어 드디어 위태롭게 서있는 허물어진 수도원에 도달한다. 창문도 다 떨어져나가고 낙서자국 가득한 오래된 수도원. 켜켜히 쌓인 시간의 흐름과 손길이 닿지 않는 버려진 곳의 애처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곳. 그와 함께 건물 바로 뒤에 우뚝 선 담처럼 버티고 있는 바위절벽이 살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흙먼지로 덮혀진 계단을 딛고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나보다 먼저 도착해 이 곳을 독점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 여행객 하나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우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이 뭐가 필요하겠나.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서.
저기 멀리 부녀로 보이는 두명의 여행객이 이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나는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간간히 뒤돌아 보면서.

저기 Saint Joan [T3, 후지 오토오토 200]

올려다보면 [T3, 후지 오토오토 200]

우뚝 [T3, 후지 오토오토 200]

앙상하게 [T3, 후지 오토오토 200]

버려진 것 [T3, 후지 오토오토 200]

창문 [FZ20]

계단 [FZ20]

옥상 [T3, 후지 오토오토 200]

바위 [T3, 후지 오토오토 200]

내려다본다 [T3, 후지 오토오토 200]

셀프컷 [FZ20]

바람에 마르다 [T3, 후지 오토오토 200]

이런 풍경이 보이는 길 [T3, 후지 오토오토 200]
다시 Funicular를 타고 내려와 이번엔 아래쪽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는 Saint Miguel로 가보려 했지만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기차시각이 영 마음에 걸린다. 산 미구엘 쪽을 다녀오려면 최소 두시간은 걸린다고 하던데. 조금 고민하다가 그쪽은 포기하고 미처 돌아보지 못한 주변을 산책한다. 산쪽으로 난 산책로에는 조용한 곳을 찾아온 수녀님과 몇몇 여행객들과 고양이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잎이 유난히 짙은 초록색을 띄고 있는 이곳에는 곳곳에 성자들의 동상이 서있었고 그들은 한결같이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다.

숲 속의 마리아 [FZ20]

고양이 둘 [FZ20]

그루밍 삼매경 [FZ20]

수사 [T3, 후지 오토오토 200]

안녕- [FZ20]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수도원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벽돌 한장 무게의 묵직한 초콜릿 바를 세개 산다. 친구들에게 전해줄 그 달콤하고 무거운 선물을 손에 쥐고 이번엔 케이블카가 아니라 신식 열차를 타고 몬세랏을 내려간다. 그 안에서 우연히 두달 동안 유럽을 여행중인 한국 여자애를 만났다. 한국 민박에 묵고 있다는데 론다에서 만난 그 언니도 거기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쩐지 반가운 기분. 4시 6분에 플랫폼에 도착한 R5 FGC를 타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한다. 올때는 혼자였는데 돌아갈 때는 동행이 생겼고 초콜렛 세개 만큼 가방도 더 무거워졌다.
에스빠냐 역에 도착할 때까지 오랫만에 한국말로 실컷 떠들었더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 역에서 그 아이와는 안녕하고 나는 내일 까다께스로 갈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북부 터미널에 잠깐 들렀다. 까다께스로 가는 버스는 하루 두번. 정말 깡촌이다. 달리가 아니었다면 내가 절대 알 수 없었을 그 곳으로 내일 오전에 떠나는 버스표를 받아들고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
묵직한 초콜렛 등을 내려놓을 심산으로 들어간 방에는 새로 일본인 청년이 짐을 풀고 있었다. 나름 며칠 먼저 도착한 선배라고 지도를 놓고 몬쥬익에 가는 방법과 해변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는 좋은 웃음을 보여주어서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저절로 발걸음이 항구와 해변쪽으로 향했다. 오늘의 람블라스 거리는 퍼포먼스 아티스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시계를 달고있는 청동분장을 한 마임니스트, 나무 요정으로 분한 퍼포먼서, 멋드러진 탱고를 추는 남녀와 해골 인형을 다루는 인형사까지 거리는 아마추어 예술가와 관객의 웃음소리와 동전 던지는 소리로 활기에 넘친다. 그 활기찬 거리를 아껴가며 걸어 항구에 닿는다. 파도처럼 너울치는 다리인 '람블라 드 마르'를 건너 쇼핑몰을 한바퀴 둘러보며 부탁받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우선 찜해놓고 나와 다시 항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리는 흥겨운 리듬.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들은 4인조 레게 밴드였다. 어둑해오는 항구에 정박된 수백대의 요트를 뒷배경으로 그들은 바다 냄새가 나는 흥겨운 레게를 연주했고 나는 어느새 가장 앞줄에 앉아 몸을 흔들고 있었다. 어두워져 잘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은 계속 연주했고 그렇게 삼십분을 행복한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마지막 곡을 끝내고 나는 브라보!를 외쳤고 그들은 내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레게에는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특히 바다에서 듣는 레게는 더 그렇다.

시계를 단 마임니스트 [T3, 후지 오토오토 200]

나무여인 [FZ20]

탱고 [FZ20]

람블라 드 마르 [T3, 후지 오토오토 200]

해가 지다 [FZ20]
해변 한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식당에서 빠에야와 맥주를 주문했다. 분명 소금은 넣지 말라고 했는데도 빠에야가 너무 짜다. 맛있는데 너무 짜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대신 맥주는 최고로 시원했으니 뭐 눈감아 주기로 하자. 어제 맥주를 샀던 마트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오렌지를 사서 달랑달랑 봉지를 흔들며 완전히 깜깜해진 길을 다시 걸었다. 이제 람블라스 거리는 컬러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이런저런 물건을 대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불고 번지게 만드니 믿을 수 없이 정교한 그림들이 탄생한다. 그림보다 스프레이로 그런 걸 만들어내는 과정이 더 신기했다. 그림 한장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아마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그림을 그리겠지.

밤의 해변 [FZ20]

개구리 피아니스트 [FZ20]

스프레이로 그린 그림들 [FZ20]
다시 짐을 챙겨야 할 때. 내일 아침을 대비해 배낭을 차곡차곡 다시 싼다. 어느 새 떠나올 때보다 이것저것 많이 늘어났다. 여행의 막바지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 by | 2007/04/12 13:18 | 지구정복자료수집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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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어디인지..뭐가 뭔지 잘 몰랐었는데..
덕분에 다시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djsolmi / 리얼라를 아끼느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