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5월 28일
부산, 짧은 여정의 기록
새로 산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서울역에는 늘 그렇듯이 몇몇의 노숙자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이 뒤섞여 얕은 흥분의 기운이 떠돌고 있었고, 자동발매기에서 작은 티켓을 받아 든 나는 점심까지 걸러 난동을 부리고 있는 뱃속에 햄버거를 급히 구겨넣고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기차가 좋아지고 빨라졌다지만 그래도 기차의 냄새는 그대로다. 약간 끕끕한 듯한 쇳냄새. 그것이 내가 아는 기차의 냄새.
서울역을 떠나 달리기 시작하고, 300km의 속도를 체감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 채 헤드폰을 쓰고 책을 읽는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기차는 첫번째 기착지에 천천히 선다. 언제나 나의 행선지였던 익숙한 대전역을 그냥 지나쳐보내는 기분은 살짝 묘했다. 내가 멀리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다가 깨다가 책을 읽다가 노래를 듣다가를 반복하고 기차가 10분쯤 늦장을 부린 덕에 부산역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을 조금 넘어서였다. 아주아주 오래 전 와봤던 부산역은 기억에 없어 낯설었고, 나는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향해 가방을 끌었다.
여기는 낯선 도시,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얼굴. 그제서야 나는 부산역 주변의 옛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부드럽게 운전하는 그의 옆자리에 타고 밤의 부산을 내다본다. 내 생애 최고의 베스트 드라이버는 우리 아빠였는데, 당신도 그에 못지 않군요. 베스트 드라이버의 칭호를 주겠어요, 김기사.
잠시 차를 멈추어 달이 안보이는 달맞이 고개에서 천원짜리를 낼름 먹어버린 자판기를 원망하며 세상에서 제일 비싼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저기 멀리 바다가 있을텐데 검게만 보여 짐작만 할 뿐이다. 진짜 바다를 보러 간 해운대는 밤이 깊었고, 더 늦게까지 우리는 정종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했다. 바닷가의 선술집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며, 사람의 체온은 따뜻했다.
늦게 잠자리에 든 것에 비하면 조금 이른 기상. 가이드 양반, 오늘은 어디로 향할테요? 부산에서는 그저 모든 걸 맡기고 즐기는 역할만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고민도 안할테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이 약간 보이는 딱 좋은 날씨였다. 부처님의 보은이시련가. 그치만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데. 통영까지 달려 외도에 가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배가 뜰지 안뜰지가 의심스러워 그냥 부산을 돌아보기로 한다. 합류하기로 한 친구들을 태워 간 곳은 태종대. 이름은 무지 많이 들어봤는데 말이죠, 나 여기 처음와봐요.
우선은 걷는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나무가 드리워진 산책길을 걷는다. 사이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의 해말이 하얗고, 저기 멀리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트롯가요가 재밌었다. 나무들은 키가 컸고, 절벽 아래의 파도소리가 좋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강약을 조절하며 기다리게 만들었다. 전망대에서 오륙도가 왜 오륙도인지 알게 되었고, 긴 나무 계단을 내려가 등대 아래로 설정 사진들을 찍었고, 안마 10회권 티켓을 걸고 한 내기에 져버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의 바위 위에는 언제적 공룡인지 모를 공룡의 발자국이 선명했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바닷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한 채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람을 맞는다. 이상하게 생긴 절벽 위 조형물의 쓰임새가 무얼까를 고민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와아 너무 좋아'를 연발하고 있었다.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그 앞에 바다와 등대가 있다는 게 더없이 좋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뜨거운 햇살아래 오래 걸었더니 지쳐버려 코끼리 열차를 잡아 탄다. 뭐야, 진작 탈걸. 문명의 이기란 이리도 좋은 것을. 이로써 태종대를 한바퀴 휘휘 돌아 우리는 충실한 관광객 역할을 마쳤다.
어디 갈까. 동해안 따라서 좀 올라가 볼까? 그러나 송정을 지났을 무렵 용궁사로 가는 그 짧은 길은 꽉꽉 막혀있었다. 아, 오늘 부처님 오신날. 그러니까 휴일. 용궁사는 포기하고, 밥이나 먹자. 이미 밥때를 지나버려 배가 엄청 고프다구. 해서 들어간 식당은 그야말로 풀밭 위에 지은 밥집. 게장과 정식을 시켜서 한상 푸짐하게 받는다. 시장이 반찬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눈물나게 맛있어. 다들 배가 고팠기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열심히 먹기만 하는구나. 마지막 호박식혜까지 완벽하게 다 비우고 나니, 정말 깨끗하게도 먹었다.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에 웃음이 어리고, 여기 드러누워 딱 삼십분만 단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배실배실 배어나온다.
배를 두드리며 다시 차를 돌려 우리는 송정 바닷가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정말 어찌나 휙휙 잘도 날리는지 감탄하면서. 저기 윈드서핑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네. 바람이 적절하게 불어 즐거워 보인다. 모래밭 위에서 발야구를 하는 팀들도 있고, 대부분은 돗자리를 들고 놀러나온 가족과 연인들. 너무 한가하지도 너무 북적이지도 않아 딱 좋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에 발을 파묻고 걷다가 적당한 곳에 앉는다. 파고드는 바람이 약간 쌀쌀하기도 하여 그의 등에 기대어 온기를 빌린다. 조근조근 얘기를 하다가 그가 불러주는 노래를 듣다가. 한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 철이른 바닷가는 아주아주 다정했다.
트럭에서 파는 따뜻한 원두커피를 마시며 발의 모래를 턴다. 어느 새 바지 주머니까지 파고든 고운 모래를 탈탈 털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바닷가에 등을 돌린다. 안녕 바다.
오랫만에 걷는 걸음, 그리고 어제 이어진 술자리에 몸이 놀랬던지 정말 세상 모르고 잤나봐. 이미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나서는 한참을 이불을 휘감고 방안을 돌아다녔다. 아, 밤새 내렸던 비는 완전히 그치고 하늘이 더없이 깨끗한 걸 확인한 후에야 눈이 반짝 떠진다. 나가자 나가. 이리 좋은 날씨를 어찌 낭비하려고.
이미 점심이 되어버린 식사. 사람은 밥심이지, 역시나 한정식으로 잘 차려 먹고는 범어사를 찾아갔다. 나, 여기 이렇게 오래되고 큰 사찰인 줄 몰랐어. 대나무가 바람에 쓸려 쏴아쏴아 소리를 낸다.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흔들려 그늘을 쓸어준다. 계곡의 물소리가 멀리서 시원함을 더해주고, 입구의 사천왕상은 내가 절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들.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귓바퀴를 휘감아 눈웃음을 만들고, 연등을 태우는 손길이 분주하다. 손님을 잔뜩 맞았던 방석들을 담 위에 널어 뽀송뽀송 말리고 있고, 등산로로 향하는 작은 길은 오붓하니 좋았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있는 등산로의 안쪽. 물소리를 따라 들어가 짙은 청록의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잠시 이어지는 침묵. 별 말이 필요없는 순간, 우리는 가장 많은 소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위들이 깔린 등산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면 금강암이라는 작은 절이 나온다. 계단 위에 '금강암' 이라고 써있는 문이 너무 예뻐서, 그리고 그 문 안쪽을 들여다 보았을 때 아담한 잔디밭을 가진 그 사찰이 너무 고요해서, 사찰의 기둥마다 써진 글귀들이 너무 깊어서, 뒤를 둘러싼 나무들이 흔들리는게 너무 시원해서, 풍경 소리가 너무 청명해서, 같이 있는 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절의 한 귀퉁이 마루에 앉아서 이 곳은 가끔 꿈에도 나오겠구나 나는 알아채었다.
범어사에서 내려와 잠시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둘러봤다. 단골 문구점 아저씨가 아직도 그대로 계시다며 신나하는 그와 함께 그 문구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었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는 공놀이를 하며 놀고있는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남아있었는데 다들 부산 사투리를 쓰고 있어 귀여웠다. 그도 역시, 그랬겠지.
기왕 이렇게 사찰들을 돌아봤는데, 그럼 어제 못간 용궁사에도 갈까? 응, 좋아. 오늘은 평일이니까 길도 막히지 않겠지. 과연, 길은 시원스레 쭉쭉 달려서 금새 용궁사 입구에 차를 세운다. 용궁사는 뭐랄까, 절벽 위에 있어 과연, 이었고 이제까지 본 절 중에 가장 기묘했다. 해동불교 사원은 처음 가봤는데 불교와 토속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키치적이고도 정겨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까지 연등을 걷지 않아 색색의 연등이 마당을 가득 메웠고, 파도치는 절벽 위에 관음상이 의연하다. 그치만 또 경내 안에 자리잡은 용이나 거대한 금복주 처럼 생긴 사람좋은 웃음을 웃는 불상은 너무나 낯설어서 두근두근. 누구나 소원 한가지씩 이루어진다는 용궁사로 가는 구름다리 위에서 작은 연못에 동전을 던진다. 열개의 동전을 던졌는데 네개나 들어갔으니까 소원 하나쯤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리 둘이 똑같은 소원을 빌었으니까 분명히, 라고 믿기로 한다.
아, 그리고 그거 알아요? 용궁사 관음상 아래 절벽에는 고양이들이 살고 있어요. 위험한 절벽 사이를 사뿐사뿐 잘도 뛰어넘어 그렇게 파도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 고양이들이 있으니까 내년에 다시 한번 찾아가서 '안녕- 잘 살았니' 라고 인사를 전해야지.
회 먹으러 가자. 용궁사를 빠져나오며 다음 행선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조금 더 위쪽으로 5분을 달리면 대변항이 나온다. 짠내가 진동하는 그 항구에 도착했을 때, 멸치잡이배가 때마침 들어와 그물에서 멸치를 털고 있었다. 오징어와 멸치젓과 각종 생선을 말려 내다파는 아주머니들이 손짓한다. 항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가장 작은 모듬회를 주문한다. 아직 조금 일러 아무도 없는 횟집을 전세내고 싱싱한 회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는데도 둘이 먹다가 어느 새 지쳐버렸다. 서울에서 파는 가장 큰 회접시보다 더 많이 가득가득 나왔단 말이지. 도저히 다 먹을 수 없었어. 분명 서울가서 후회할 거 아는데, 회를 남겨버렸다. 흑. 아, 지금 다시 생각나버렸다. 엉엉.
늘어선 가게집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간판의 불이 하나 둘씩 켜지는 항구를 스르륵 빠져나온다. 조금 피곤하다, 그치? 내일 아침 버스가 몇시에 있나? 올라가기 싫은데 하루 더 있을까. 그런 얘기들을 나누며 복닥거리는 부산 시내로 돌아왔다. 나는 바다있는 도시가 좋아. 바르셀로나도 그랬고, 여기 부산도 참 좋은데. 맨날 일하러 와서 벡스코밖에 본 기억이 없는데, 여기 정말 재밌는 동네잖아.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 머리를 쓰윽쓰윽 부벼주는 것이 이번 부산 여행의 마지막 기억. 그렇게 짧은 여행은 아주 스르르륵 막이 내린다.
덧. 약간의 사진들
서울역을 떠나 달리기 시작하고, 300km의 속도를 체감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덜컹거림에 몸을 맡긴 채 헤드폰을 쓰고 책을 읽는다. 한시간쯤 지났을까, 기차는 첫번째 기착지에 천천히 선다. 언제나 나의 행선지였던 익숙한 대전역을 그냥 지나쳐보내는 기분은 살짝 묘했다. 내가 멀리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다가 깨다가 책을 읽다가 노래를 듣다가를 반복하고 기차가 10분쯤 늦장을 부린 덕에 부산역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을 조금 넘어서였다. 아주아주 오래 전 와봤던 부산역은 기억에 없어 낯설었고, 나는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향해 가방을 끌었다.
여기는 낯선 도시,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얼굴. 그제서야 나는 부산역 주변의 옛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부드럽게 운전하는 그의 옆자리에 타고 밤의 부산을 내다본다. 내 생애 최고의 베스트 드라이버는 우리 아빠였는데, 당신도 그에 못지 않군요. 베스트 드라이버의 칭호를 주겠어요, 김기사.
잠시 차를 멈추어 달이 안보이는 달맞이 고개에서 천원짜리를 낼름 먹어버린 자판기를 원망하며 세상에서 제일 비싼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저기 멀리 바다가 있을텐데 검게만 보여 짐작만 할 뿐이다. 진짜 바다를 보러 간 해운대는 밤이 깊었고, 더 늦게까지 우리는 정종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했다. 바닷가의 선술집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며, 사람의 체온은 따뜻했다.
늦게 잠자리에 든 것에 비하면 조금 이른 기상. 가이드 양반, 오늘은 어디로 향할테요? 부산에서는 그저 모든 걸 맡기고 즐기는 역할만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고민도 안할테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구름이 약간 보이는 딱 좋은 날씨였다. 부처님의 보은이시련가. 그치만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데. 통영까지 달려 외도에 가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배가 뜰지 안뜰지가 의심스러워 그냥 부산을 돌아보기로 한다. 합류하기로 한 친구들을 태워 간 곳은 태종대. 이름은 무지 많이 들어봤는데 말이죠, 나 여기 처음와봐요.
우선은 걷는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 나무가 드리워진 산책길을 걷는다. 사이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의 해말이 하얗고, 저기 멀리 유람선에서 흘러나오는 트롯가요가 재밌었다. 나무들은 키가 컸고, 절벽 아래의 파도소리가 좋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강약을 조절하며 기다리게 만들었다. 전망대에서 오륙도가 왜 오륙도인지 알게 되었고, 긴 나무 계단을 내려가 등대 아래로 설정 사진들을 찍었고, 안마 10회권 티켓을 걸고 한 내기에 져버렸다. 바람이 불어오는 절벽의 바위 위에는 언제적 공룡인지 모를 공룡의 발자국이 선명했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바닷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한 채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람을 맞는다. 이상하게 생긴 절벽 위 조형물의 쓰임새가 무얼까를 고민한다. 우리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와아 너무 좋아'를 연발하고 있었다. 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그 앞에 바다와 등대가 있다는 게 더없이 좋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뜨거운 햇살아래 오래 걸었더니 지쳐버려 코끼리 열차를 잡아 탄다. 뭐야, 진작 탈걸. 문명의 이기란 이리도 좋은 것을. 이로써 태종대를 한바퀴 휘휘 돌아 우리는 충실한 관광객 역할을 마쳤다.
어디 갈까. 동해안 따라서 좀 올라가 볼까? 그러나 송정을 지났을 무렵 용궁사로 가는 그 짧은 길은 꽉꽉 막혀있었다. 아, 오늘 부처님 오신날. 그러니까 휴일. 용궁사는 포기하고, 밥이나 먹자. 이미 밥때를 지나버려 배가 엄청 고프다구. 해서 들어간 식당은 그야말로 풀밭 위에 지은 밥집. 게장과 정식을 시켜서 한상 푸짐하게 받는다. 시장이 반찬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눈물나게 맛있어. 다들 배가 고팠기에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열심히 먹기만 하는구나. 마지막 호박식혜까지 완벽하게 다 비우고 나니, 정말 깨끗하게도 먹었다.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에 웃음이 어리고, 여기 드러누워 딱 삼십분만 단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배실배실 배어나온다.
배를 두드리며 다시 차를 돌려 우리는 송정 바닷가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정말 어찌나 휙휙 잘도 날리는지 감탄하면서. 저기 윈드서핑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네. 바람이 적절하게 불어 즐거워 보인다. 모래밭 위에서 발야구를 하는 팀들도 있고, 대부분은 돗자리를 들고 놀러나온 가족과 연인들. 너무 한가하지도 너무 북적이지도 않아 딱 좋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모래에 발을 파묻고 걷다가 적당한 곳에 앉는다. 파고드는 바람이 약간 쌀쌀하기도 하여 그의 등에 기대어 온기를 빌린다. 조근조근 얘기를 하다가 그가 불러주는 노래를 듣다가. 한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 철이른 바닷가는 아주아주 다정했다.
트럭에서 파는 따뜻한 원두커피를 마시며 발의 모래를 턴다. 어느 새 바지 주머니까지 파고든 고운 모래를 탈탈 털고, 먹구름이 몰려오는 바닷가에 등을 돌린다. 안녕 바다.
오랫만에 걷는 걸음, 그리고 어제 이어진 술자리에 몸이 놀랬던지 정말 세상 모르고 잤나봐. 이미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나서는 한참을 이불을 휘감고 방안을 돌아다녔다. 아, 밤새 내렸던 비는 완전히 그치고 하늘이 더없이 깨끗한 걸 확인한 후에야 눈이 반짝 떠진다. 나가자 나가. 이리 좋은 날씨를 어찌 낭비하려고.
이미 점심이 되어버린 식사. 사람은 밥심이지, 역시나 한정식으로 잘 차려 먹고는 범어사를 찾아갔다. 나, 여기 이렇게 오래되고 큰 사찰인 줄 몰랐어. 대나무가 바람에 쓸려 쏴아쏴아 소리를 낸다.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흔들려 그늘을 쓸어준다. 계곡의 물소리가 멀리서 시원함을 더해주고, 입구의 사천왕상은 내가 절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들.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귓바퀴를 휘감아 눈웃음을 만들고, 연등을 태우는 손길이 분주하다. 손님을 잔뜩 맞았던 방석들을 담 위에 널어 뽀송뽀송 말리고 있고, 등산로로 향하는 작은 길은 오붓하니 좋았다.
커다란 바위들이 널려있는 등산로의 안쪽. 물소리를 따라 들어가 짙은 청록의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잠시 이어지는 침묵. 별 말이 필요없는 순간, 우리는 가장 많은 소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바위들이 깔린 등산로를 따라 1km쯤 올라가면 금강암이라는 작은 절이 나온다. 계단 위에 '금강암' 이라고 써있는 문이 너무 예뻐서, 그리고 그 문 안쪽을 들여다 보았을 때 아담한 잔디밭을 가진 그 사찰이 너무 고요해서, 사찰의 기둥마다 써진 글귀들이 너무 깊어서, 뒤를 둘러싼 나무들이 흔들리는게 너무 시원해서, 풍경 소리가 너무 청명해서, 같이 있는 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절의 한 귀퉁이 마루에 앉아서 이 곳은 가끔 꿈에도 나오겠구나 나는 알아채었다.
범어사에서 내려와 잠시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둘러봤다. 단골 문구점 아저씨가 아직도 그대로 계시다며 신나하는 그와 함께 그 문구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었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는 공놀이를 하며 놀고있는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남아있었는데 다들 부산 사투리를 쓰고 있어 귀여웠다. 그도 역시, 그랬겠지.
기왕 이렇게 사찰들을 돌아봤는데, 그럼 어제 못간 용궁사에도 갈까? 응, 좋아. 오늘은 평일이니까 길도 막히지 않겠지. 과연, 길은 시원스레 쭉쭉 달려서 금새 용궁사 입구에 차를 세운다. 용궁사는 뭐랄까, 절벽 위에 있어 과연, 이었고 이제까지 본 절 중에 가장 기묘했다. 해동불교 사원은 처음 가봤는데 불교와 토속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하여 키치적이고도 정겨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까지 연등을 걷지 않아 색색의 연등이 마당을 가득 메웠고, 파도치는 절벽 위에 관음상이 의연하다. 그치만 또 경내 안에 자리잡은 용이나 거대한 금복주 처럼 생긴 사람좋은 웃음을 웃는 불상은 너무나 낯설어서 두근두근. 누구나 소원 한가지씩 이루어진다는 용궁사로 가는 구름다리 위에서 작은 연못에 동전을 던진다. 열개의 동전을 던졌는데 네개나 들어갔으니까 소원 하나쯤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리 둘이 똑같은 소원을 빌었으니까 분명히, 라고 믿기로 한다.
아, 그리고 그거 알아요? 용궁사 관음상 아래 절벽에는 고양이들이 살고 있어요. 위험한 절벽 사이를 사뿐사뿐 잘도 뛰어넘어 그렇게 파도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 고양이들이 있으니까 내년에 다시 한번 찾아가서 '안녕- 잘 살았니' 라고 인사를 전해야지.
회 먹으러 가자. 용궁사를 빠져나오며 다음 행선지는 그렇게 정해졌다. 조금 더 위쪽으로 5분을 달리면 대변항이 나온다. 짠내가 진동하는 그 항구에 도착했을 때, 멸치잡이배가 때마침 들어와 그물에서 멸치를 털고 있었다. 오징어와 멸치젓과 각종 생선을 말려 내다파는 아주머니들이 손짓한다. 항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가장 작은 모듬회를 주문한다. 아직 조금 일러 아무도 없는 횟집을 전세내고 싱싱한 회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는데도 둘이 먹다가 어느 새 지쳐버렸다. 서울에서 파는 가장 큰 회접시보다 더 많이 가득가득 나왔단 말이지. 도저히 다 먹을 수 없었어. 분명 서울가서 후회할 거 아는데, 회를 남겨버렸다. 흑. 아, 지금 다시 생각나버렸다. 엉엉.
늘어선 가게집들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간판의 불이 하나 둘씩 켜지는 항구를 스르륵 빠져나온다. 조금 피곤하다, 그치? 내일 아침 버스가 몇시에 있나? 올라가기 싫은데 하루 더 있을까. 그런 얘기들을 나누며 복닥거리는 부산 시내로 돌아왔다. 나는 바다있는 도시가 좋아. 바르셀로나도 그랬고, 여기 부산도 참 좋은데. 맨날 일하러 와서 벡스코밖에 본 기억이 없는데, 여기 정말 재밌는 동네잖아.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 머리를 쓰윽쓰윽 부벼주는 것이 이번 부산 여행의 마지막 기억. 그렇게 짧은 여행은 아주 스르르륵 막이 내린다.
덧. 약간의 사진들
# by | 2007/05/28 12:35 | 지구정복자료수집 | 트랙백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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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쟁이. ㅋㄷ
그나저나 회를 남기시다니 저한텐 절대 없는 일입니다~!
좋은 분과 함께 하셨다니, 더더욱 좋으셨겠어요!!!^_^;;;
두분 모두 웃는 모습이 너무 선해서 아주 그냥 흐뭇합니다. 하하하
이런 글을 읽으면 전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단 생각이 마구 든단 말이죠^^
nabiko / 다음엔 산성 따라 산 타보려구요
똘기 / 올해, 가면 안될까?
yumyum / 그렇다니 저도 기분 좋아요
쏘이 / 누구는 소년같다 그러고 누구는 늙어보인다 그러고;;
djsol / 그럼요, 누구 사진인데요
행인1 / 네, 즐거웠어요
카스테라 / 아, 카군의 고향도 부산! 여행쟁이라니 좋지 뭐야
saraswati / 소녀라니 이 얼마나 가슴뛰는 단어인가
이솔레티 / 네, 좋았어요. 남긴 회는 꿈에 나왔어요
D-cat / 송정, 좋더군요
나무피리 / 아, 피리님도!
PETER / 웃는 얼굴, 저도 참 좋아해요
Pooh- / 좋은 곳이더군요 정말
아리엘 / 고맙습니다
쿨짹 / 얼른 귀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