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야 in France #06

#6. 9월 23일
파리의 일요일

 어쩐지 어젯밤에는 푹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척거렸다. 추석연휴의 북적거림과 송편을 빚는 풍경을 상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일어나기는 또 일찍 일어나서 늦장을 마음껏 부리다가 9시 반쯤 숙소를 나선다.
 일요일이라 메트로 안에 사람도 별로 없고 아주 한산하다. 그리고 나는 주말 오전에 열리는 벼룩시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람냄새가 진득하니 난다는 방브 벼룩시장.
 그곳은 정말 말 그대로 순수한 벼룩시장이었다. 어디 벽장에서 꺼내왔는지 퀴퀴한 좀약냄새가 그대로 배어있는 낡은 옷들과 장난감들, 차고에서 금방 꺼내온 것이 분명한 먼지 뽀얀 오래된 카메라와 믹서기와 전자제품과 책들. 씨디도 간간히 보이고 악세서리니 오래된 엽서와 우표니 그릇과 장식품들을 비롯한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와 제각기 오래된 향을 뿜어 내고 있었다.
 뭐에 쓰는 물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을 구경하는 호기심 어린 눈길부터 딱 맞는 장난감과 동화책을 찾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뒤지고 다니는 어린아이의 욕심많은 눈길이 교차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한덩어리가 되어 즐거운 그 곳은 우리가 세련된 모습만을 기대하는 파리지엔에 대한 환상을 배반하는 대신 사람냄새가 배인 곳이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절대 팔 생각도 안하고, 절대 살 생각도 안했을 물건들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의 차이일까. 어린 아이들도 신나게 헌 장난감과 책들을 고른다. 글쎄, 우리 나라 애들이라면 새거 사달라며 울고 불고 할 것을 저렇게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신나하는 것을 보자니 역시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돌아보게 된다. 낡았다 무조건 버리거나 부숴버리지 않고 나누고 다시 쓰고 돌아보는 습관이 몸에 밴 어른으로 자라겠지. 아마 그래서 파리의 오래된 건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기도 할테고.

<방브 벼룩시장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골라 보아요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형, 왜케 안팔리지?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빈티지풍의 낡은 니트 모자를 사고 싶었으나 파는 주인이 안보여 한참을 서성이다 구경만으로 배부르다고 위로하며 벼룩시장을 빠져나왔다. 벼룩시장에서 간단한 주전부리와 음료를 만들어 파는 노점을 하면 잘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음악을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며 중고 씨디를 팔던 귀여운 두 여자애는 장사를 잘 했을까나.

 


 다시 메트로를 타고 1호선의 끝으로 간다. 최첨단 계획 신도시 비슷한 라 데팡스가 그곳에 있다. 파리에서 처음 보는 현대식고층건물이라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서울이나 도쿄보다는 더 미적이고, 공원을 잊지 않은 것은 역시 프랑스다웠다. 하지만신개선문이라는 그랑 다르슈, 거대한 문이 제일 먼저 반기는 그 곳은 마치 유령도시 같았다.
 일요일의 라 데팡스는 어디든 문이 꽁꽁 닫혀져있고 한 두명의 산책하는 이를 빼놓으면 아무도 없어서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의 한 셋트장을 걷는 기분마저 들었다. 평일은 또 다른 분위기가 나겠지.
 배고파서 계속 신호가 오는데 문을 연 곳이 단 한곳도 없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새것이지만 너무나조용한 길을 산책한다. 미로의 작품이라는 솟은 동글뱅이들의 너머로 개선문이 보인다. 옛 개선문과 신 개선문은 이렇게 일직선 상에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콩코드 광장, 그 너머에 루브르가 있겠지.

<그랑 다슈르 / Lumix LX-2>

<미로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아무도 없다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Red / Lumix LX-2>

<도시적 / Lumix LX-2>

<일요일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개선문이 보인다 / Lumix LX-2>


 샹제리제 거리에 내렸을 때는 도대체가 길은 막혀있고 사람들로 버글거려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밥을 향해 걸어야 했으나 길을 건너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지.
 아, 오늘 무슨 퍼레이드가 있나보다. 나도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들어 기다리고 있자니 깃발을 들고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이연주를 하고 춤을 추며 퍼레이드를 벌이고 지나갔다. 스코틀랜드 킬트처럼 보이는 치마를 입은 아저씨들과 파이프 연주단도 있었어.흥겨운 댄스는 박수를 받았고 연주는 더없이 신났다. 축제의 분위기란 참 좋구나, 그리고 나는 오늘 배고픈 행운을 만났구나.

<퍼레이드 / Lumix LX-2>

<연주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퍼레이드가 끝나고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퍼레이드보다 더 좋았던 건 개선문 앞의 넓은 샹제리제 거리의 도로가 잠시나마차가 아닌 사람들의 차지였다는 것이다. 덕분에 도로 한가운데서 신나는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다. 잠시의 시간, 차들이 점령하지않은 파리의 한가운데에 섰다.
 샹제리제는 정말 사람들로 드글드글해서 모든 음식점과 카페에 줄이 50미터씩은 늘어섰고 시끌시끌했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거리라기 보다는 명동 한복판을 연상케했다. 작은 골목의 즐거움이 여긴 없어서 나는 조금씩 지쳤다. 아무 곳에나 들어가 크레페를주문했으나 맛은 별로. 그냥 허기를 채우는데 의의를 둔다.
 개선문을 멀찍이서 보고, 아래서 한번 보고 나는 이 거리를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루이비통 본점(?)을 신전처럼추앙하는 관광객들이 보기 싫었고 이 번잡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샹제리제는 내 취향이 아니었어. 작고 특별한 것이 나를 잡아끄는것들. 같은 사치라 할지라도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나의 취향, 실은 수제로 만든 소박한 것들이 나의 취향.

<차 없는 샹제리제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관광객들?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개선문 / Lumix LX-2>

 샹제리제를 일찍 빠져나오고 나니 시간 여유가 많다. 여유가 많은 김에 이곳 저곳 둘러봐야지.
 우선은 아랍 문화원이다. 그 유명한 건축물 있잖수. 전체가 자연광에 의해 자동 조절되는 조리개로 이루어진 그 건물 말이야. 이슬람과 모던함의 조화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건물 자체도 너무 멋지고. 안에 들어가있으면 적당한 햇빛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다. 과연 괜히 유명한 것은 아니었군.

<학교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아랍 문화원 / Lumix LX-2>

 햇빛을 쬐며 쉬다가 Pont Sally를 건너서 생 루이섬으로 다시 갔다. 샹젤리제의 번잡함을 씻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참 좋단 말이지. 좁은 골목을 걸으며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었다. 그리고 다시 Pont Marie를 건너 마레지구 한 구석에 있는 유럽 사진 뮤지엄을 간다. 일요일이라 사람은 좀 많은 편이었다. 잔디밭에서 누워 자는 커다란 강아지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들어갔다.
 유럽의 유명 작가들의 사진들과 함께 컨템포러리 전시는 작고 기이한 방의 모형을 만들어 그걸 찍는 현대 사진가의 작품이었다. 모형과 사진이 동시에 전시되는데 보면 볼수록 이 작가 편집증 환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쩜 그리 정교해?
 전시 자체도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청년들까지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전시회를 떠올리면 대부분 숙제하러 나온 애들과 엄마, 그리고 관심있는 젊은층들 뿐인데.
 파리가 부러운 것은 TV를 벗어나 전시든 뭐든 항상 즐기고 찾을 거리가 많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찾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문화란 정책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부러움의 순간이다. 

<일요일 세느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생 루이섬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강변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강변의 중고책 서점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유럽 사진 뮤지엄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뮤지엄을 빠져나와 한가하게 마레의 구석구석 걷기 시작한다. 첫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구경한다. 오래된 잡지가게를 지나며 옛 보그지의 표지에 감탄한다. 역시 70년대 패션이 좋았어.
 멋진 옷가게와 인테리어 샵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저거다!' 싶어서 들어가면 근데 왜 꼭 200유로를 넘는건데. 내가 눈이 높은건지 어쩐건지. 스타일 딱 맘에 드는 편집 매장에 들어가서 맘에 쏙 드는 원피스를 집으니 이건 마크 제이콥스였다. 한숨을 쉬며 택을 확인하니 무려 456유로였나.
 샹제리제의 그 명품샵들을 지나면서는 아무 느낌이 없었으나 여기선 '역시 로또' 라며 고개를 저었지. 하하. 그러나 잊자 잊어. 여기서 이러고 돌아다니며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복받은거지. (라고 고개를 들며 웃는 순간 뜨끈한 강아지 응가를 밟고야 말았다)

<잡동사니 인테리어 샵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얼굴 없는 사내 / Lumix LX-2>

<마레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주름진 개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위를 보면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저 건물 1층 샵에 465유로 원피스가 / Lumix LX-2>

<인베이더 한마리 더 / Lumix LX-2>

<아주아주 낡은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제라드의 누드 / Lumix LX-2>


 온갖 여유를 부리며 골목 뒤지기를 하다보니 일요일의 저녁이 찾아온다. 적당히 어두워져 나는 또 적당히 예쁜 카페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다. 루꼴라 펜네와 맥주, 아주 잘 어울렸다. 양이 많아서 남기고 말았지만 정말 맛있었어. 남기는 바람에 맛없냐고 걱정하는 주방장에게 아니라며 최대한 기분좋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진한 커피로 마무리.
 
 오늘이 실질적으로 파리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몽생미셸에 다녀올테고, 마지막날은 공항가기 전의 아쉬움으로 정신이 없을 테니까. 마무리치고 나쁘지 않았어. 커피가 아주아주 맛있었거든.

<시청 옆, 시장이 열리는 자리 / Lumix LX-2>

<식사 / Lumix LX-2>

<숙소 앞 골목길 / Contax T3, 아그파울트라100>



by 니야 | 2007/12/21 14:07 | 지구정복자료수집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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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쿨짹 at 2007/12/21 14:20
옷 제라드 누드 인상적이다 ㅋ
Commented by HanSang_환상 at 2007/12/21 15:26
나도 제라드 누드... 흐흐흐;;; 근데 펼쳐보고 싶지는 않아진... 우헤헤.
Commented by 뱡뱡 at 2007/12/21 15:34
저 조금 전에 파리 여행에서 가져온 것들 정리했는데 니야님 사진 보니깐 새록새록 하네요. 전 가서 2주동안 건축기행 하고 왔거든요. (전공이 건축;;) 저희 만나면 빠리얘기나 한보따리 하죠! 헤헤
Commented by cain at 2007/12/21 17:44
사진들 보니까 니야님 서울 기행도 보고 싶어졌어요. ^^
Commented at 2007/12/21 18:5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오윤 at 2007/12/22 10:00
멋져요_
니야님의 글을 읽으면 항상 떠나고 싶어진답니다 ㅎ
Commented by 은혈의륜 at 2007/12/22 13:11
골목길이 예쁘네요 헤에.
Commented by 민노씨 at 2007/12/24 06:30
프랑스는 있는데 니야님은 어디에??? : )
Commented by marlowe at 2007/12/24 11:07
피카츄는 어디에나 있군요.
Commented by 니야 at 2007/12/24 17:04
쿨짹 / 보는 순간 허걱.
환상 / 우헤헤- 저거 되게 오래된 잡지
뱡뱡 / 오오 건축쟁이시구나. 멋지다!
cain / 서울기행, 하고 갈까요?
비공개 / 그렇구나;;
오윤 / 떠나세요
은혈의륜 / 파리는 그래서 걸을 맛이 나요
민노씨 / 셀프는 다음편에.
marlowe / 전세계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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