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1월 05일
동네로 갈 시간
금요일 밤은 늘 누군가를 만나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제일 가깝게 생각나는 사람과 약속을 잡고 익숙한 그 곳으로 달려가니 71퍼센트쯤 만나리라 예상했던 사람들과 60.5퍼센트쯤 예기치 않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술은 조금만, 그리고 이야기는 많이. 웃음은 조금 더 많이. 그야말로 금요일 밤이었다.
옹기종기 무리 안에 카드쟁이들이 있어, 호기심에 수염을 온통 모으고 있는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귀를 기울이며 러시안 집시 점과 타로점을 보았다. 난생 처음보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러시안 집시카드는 내게 매듭과 태양과 천칭과 곰돌이를 보여주었다. 헤어진 사랑은 과거의 추억으로 극복할 것이며, 선과 악의 싸움에서 옳다고 믿는 쪽에서 물러서지 말아야하고, 태양이 항시 내 어깨를 비출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강하게 믿고 싶었던 이야기는 매듭이 해 준 이야기. 평생토록 가져갈 아주 깊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고 했다. 태양처럼 밝고 천칭처럼 공정하며 봄날의 곰처럼 친절한 사람이라면 좋겠지. 그리고 타로카드는 어느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갈등하고 있지만 당신은 아주 깊고 진지하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맨 꼭대기에 윤허의 카드가 올랐다. 슬쩍 미소가 지어지는 카드의 속삭임은 두 잔쯤 들어간 와인처럼 볼을 붉게 문지른다.
잔뜩 웃어서 주름이 생긴 눈가를 비비며 금요일과 토요일을 가로질러, 동교동과 합정동을 가로지른다. 하얀 입김이 오렌지색 가로등 밑에서 따뜻하게 보일만큼의 겨울날씨. 적절한 추위였고, 그래서 옆에서 함께 걷는 이를 다정하게 잡을 수 있었다. 돌아온 방안은 따뜻했고, 고양이의 털은 여전히 보드라웠으며, 나는 불면을 겪지 않았다.
조금 이른 토요일의 점심을 함께 먹기로 약속한 이는 나의 오랜 카운셀러였다. 선물로 토이의 새앨범을 받았다. 가기전에 나는 그에게 주어야 할 것이 많은데 이리도 받기만 한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테마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는 고맙게도 '훔치고 싶도록 매력적인 테마' 라고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비밀로 쉿- 해두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쉿- 우리는 즐거운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된다. 따뜻한 진저밀크를 마시며 헤어짐 이후와 새로운 사람에 관한 수다를 떤다. 카페의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겨울햇살이 내 등을 간질간질. 그리고 그 간지러움에 웃음이 터져나오기 직전 카페를 나선다. 나는 출근을 해야만 했다. 토요일 낮의 지하철은 의외로 사람이 많았고 아주 예뻐보이는 커플이 신도림에서 내게 자리를 내주고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다. 잭 존슨의 편안하고 부드럽고 즐거운 노래를 들으며 회사로 가는 길, 나는 귤 두봉지를 샀다. 한봉지에 이천원이었지만 아저씨는 삼천원에 두봉지를 주었다. 귤은 작고 껍질은 얇고 속살은 맛있었다. 다 함께 귤을 까먹으며 아이디어를 짜내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아 연필 끝도 함께 잘근잘근 씹어주었다. 커피를 한사발 마시고 심호흡을 하며 이마에 주름을 만드는 사무실의 오후는 드러눕고 싶은 햇살에 먼지가 떠돈다. 금새 해가 지고 저녁이 된다.
내일, 일요일의 출근을 다시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하자 생각한다. 연필을 손에서 놓는다. 그러고나니 극장에 가고 싶어졌다. 엊그제 집근처에 새로 문을 연 극장의 사이트에 들어가 영화목록을 보고, 밤 아홉시 한장의 좌석을 찜한다. 혼자 극장에 들어가 몸을 깊숙이 묻고 불이 꺼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기쁨은 토요일을 마감하기에 제격이다. 팝콘은 먹지 않을거고 아마도 대신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겠지. 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괜찮아.
자 이제, 동네로 갈 시간.
# by | 2008/01/05 19:03 | 외계인 잡설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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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 / 아이스티도 좋은데
은혈의륜 / 뭐, 가끔 보면 재밌어요
비공개1 / 많이 치유되었어
비공개2 / 그냥 주변의 이런저런 사람들 얘기지.
륜돌이 / 고마웠어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