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스, 필견!

두 말이 필요없는 무대이지만, 이번 공연은 더욱 특별했다.
토월극장의 모든 좌석을 포기하고 관객은 Staff Only라고 써있는 문을 지나 무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대학로의 아주 작은 소극장처럼 꾸며진 무대. 무대 위의 객석에서 관객은 <레이디 맥베스>의 그 전복적이고 초월적인 무대를 내려다보게 된다. 불이 꺼지고 숨을 쉴 수가 없다.

역시나 두 말할 필요없는 박재천의 타악 연주, 그리고 밀가루, 밀가루 반죽, 진흙을 이용해 극과 동시에 무대장치와 예술을 만들어내는 이영란의 오브제극, 능숙한 배우들의 광기어린 움직임. 무엇보다 레이디 맥베스 서주희의 신들린 연기. 한국에는 새로운 무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레이디 맥베스>를 보지 않은 것이다. 벌써 초연된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이 무대는 항상 전율이다. 특히 이번 무대는 더욱 그렇다. 그 많은 객석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정말 모험이자 실험이었다.

극은 널리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다. 허나, 맥베스의 5막 1장에 나오는 맥베스 부인의 괴로운 고백에만 집중하고 있다. 남편을 부추겨 왕을 암살하게 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에 충실하였으나 마지막 남은 마음의 그림자에 지배당해 괴로워하는 여인 레이디 맥베스. 궁중의사는 그녀를 부추겨 모든 진실을 털어놓게 만들며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근본의 죄의식, 그리고 욕망. 그 광기어린 변주에 숨소리 하나 내기 힘들다. 특히 레이디 맥베스를 항상 연기해왔던 서주희, 그녀가 뿜어내는 그 고통은 그녀가 물에 엎어지고 솟아오르며 객석에 뿌리는 물방울과도 같이 '억' 소리가 나도록 전해진다. 게다가 의사 역의 정동환 역시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는데 이 무대를 보고있자면 그가 왜 별 볼일 없는 드라마 조연으로 남는지 의아해진다. 의사와 맥베스를 동시에 연기하면서 레이디 맥베스를 광기로 몰아넣는 그의 연기는 서주희와 함께 좋은 앙상블을 이룬다.

죄없는 자들이여, 저주받아라. 의심받지 않는 자들이여, 증오한다.
온몸이 물에 흠뻑 젖어 쓰러지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레이디 맥베스의 이 절규는 관객석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인간의 죄란, 그리고 그 죄의식의 깊이란 어디까지인가.

극과 현장 예술의 만남, 오브제극, 여성 주인공으로의 시점 변화, 객석과 무대의 전복 등 우리 시대 최고의 연출가 한태숙의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현대적이고 새로운 해석인 동시에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정통적인 셰익스피어 극이다.

극의 마지막, 검은 샤막이 올라간다. 그리고 관객의 눈앞에 나타나는 텅빈 객석. 아, 순간 이는 전율이란. 우리는 이제까지 <레이디 맥베스>를 구경하는 입장이었지만 샤막이 걷히는 순간부터는 아니다. 지금 이 무대를 보고 있는 관객 역시 무대 위에 올라와 단죄를 받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객석과 무대를 뒤섞고 뒤집는 전복적인 연출. 배우 이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무대 위의 공포와 전율, <레이디 맥베스>는 토월극장의 모든 좌석을 포기하고 그것을 대신 관객에게도 부여해준다. 소름 돋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텅빈 객석 위로 놓여진 긴 다리. 레이디 맥베스가 그 길에 물 발자국을 남기며 멀어져간다. 그 공간의 깊이감과 처연한 뒷모습은 한동안 꿈에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 무대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있기 조차 힘들어하던 서주희씨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최고라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는 연출가 한태숙, 무대에서 너무나 빛나 보이는 정동환씨, 소리 연주가 박재천, 오브제 아티스트 이영란, 모두에게 감사를. 정말정말 좋은 무대였습니다. 정신이 멍- 해질 정도로요.

(참고로 하루에 한번만 공연한다. 수요일에는 3시 낮공연을 하는데, 이 공연 끝나고 배우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으니 관심 있고 시간 있으신 분들은 수요일 공연을 추천한다. 게다가 수요일 공연은 만원 더 싸다)


by 니야 | 2008/03/28 15:32 | culture | 트랙백(1) | 덧글(15)

트랙백 주소 : http://fruitsmilk.egloos.com/tb/367951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Red Shadow at 2008/04/08 02:54

제목 : 연극 레이디 맥베스
공연일시: 2008년 3월 21일(금)~ 4월 15일(화) (13일까지 공연에서 15일 연장 공연이 결정되었습니다. 월요일은 공연없음) 공연장소: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원작: 윌리엄 세익스피어 재창작, 연출: 한태숙 오브제 창작: 이영란 무대: 이태섭 조명: 이보만 타악: 박재천 작곡, 구음: 김민정 안무: 박호빈 의상: 김우성 - CAST - 레이디 맥베스: 서주희 궁중의사(전의), 맥베스: 정동환 오브제......more

Commented by 마르스 at 2008/03/28 15:54
나도 다음주 정도에 보러가려고. 기대하고 있지.
Commented by 마른미역 at 2008/03/28 16:02
이런. 봐야겠는데요. ^^
Commented by 이스칸달 at 2008/03/28 18:48
밸리에서 왔습니다. 관심이 많은 연극이었는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_+
Commented by intermezzo at 2008/03/29 01:07
이 공연 2000년에 봤었어요. 공연예술론입문(미학과)이라는 수업에 연극감상문이 있어서 숙제하러요;; 아무 정보도 없이 그냥 근처에 가까운데서 하는 연극을 고르다가 이걸 보러 간거였는데...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레포트 제목이 "오브제의 향연"이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ㅎㅎㅎㅎ
Commented by marie at 2008/03/29 01:22
저도 이러한 리뷰 몇개 읽어보니 도저히 이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더군요. 수요일 오전 회사 안나가도 되는날이 있어서 예매해버렸어요. 다 매진되기 전에 얼른들 카드를 꺼내드시지요.
Commented by 달크로즈 at 2008/03/31 13:14
아아. 그렇군요.
저는 '레이디 맥베스'라는 극제목만 듣고는 쇼스타코비치의 유명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랑 관련이 있는 것인줄만 알았어요.
Commented by BlueCT at 2008/03/31 14:30
나도 쉴 때 이거나 좀 볼까?
Commented by 생강 at 2008/04/01 14:16
눈이 확 뜨이네요. 정말 재밌겠어요~니야님 너무 즐겁게 지내시는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Commented by 니야 at 2008/04/01 15:27
마르스 / 정말 괜찮을거에요
마른미역 / 응, 아주 깊은 무대야
이스칸달 / 놓치지 마세요
intermezzo / 수업은 도움이 된다니까요
marie / 수요일 낮공도 좌석이 꽉 차더라구요
달크로즈 / 그 오페라 궁금한데요
BlueCT / 예술의 전당 산책하기도 좋고 좋지
생강 / :-)
Commented by hachi at 2008/04/04 00:26
아 이거 몇년전에 봤을때 진짜 서주희씨 때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는 기억이 나요.
다시 하나봐요. 다시 봐도 좋을 것 같은데.
Commented by 빨간그림자 at 2008/04/08 02:57
옆 사람을 마구마구 부추겨서 보러 가게 만들고 싶은 공연이예요. ^o^
Commented by 김수희 at 2008/04/08 11:30
안녕하세요, <레이디 맥베스> 조연출 김수흽니다.
(아무래도 따로 인사드려야겠네요; "빨간그림자님, 여기서 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니야님의 글, 저희팀 모두와 나누고자 담아갑니다.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서주희 at 2008/04/09 21:52
감사합니다..서주희입니다 ...처음으로댓글남겨요..
님의글...진심을다해준비한 우리공연팀의 마음이 관객에게 이렇게 잘전달되는구나싶어 진심으로위안받고갑니다 ..
고마워요 고마워요.. 함께해주셔서..

남은공연, 함께할관객을위해 또다시 또다시..
토해내볼렵니다 ,,,우리들의 진실을,,,
Commented by 니야 at 2008/04/10 15:49
hachi / 또 보세요
빨간그림자 / 그럼요
김수희 / 으아! 너무 고생하고 계십니다. 화이팅이에요
서주희 / 아아아아아아 서주희님 이런 영광이! 저 정말 팬이거든요. 앞으로도 멋진 무대 기대합니다.
Commented by 바람과나무 at 2008/04/15 15:20
조금 다른 시각도 있어서 덧붙여 봅니다. http://blog.naver.com/erewhon/70030008067 참고하세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